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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w rea lis real?
2011.03.01 00:32

1-1. 번역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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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 언어를 뒤섞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
                                                                                                                                                                                                  창세기 11:7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환경에 대한 적합한 정보에 의존해 살아남는다;  

사실, 위대한 수학자 노베르트 위너가 일찌기 주장했던 바,

세계란 “해당 관계인의 무수한 메시지들로 간주될 수 있다.".

이들 메시지들의 교환을 우리는 통신/소통이라 부른다. 그리고

메시지를, 일부가 왜곡되어 불확실한 상태로,

수취인이 받는 경우, 그 결과는 혼동이다;

여건에 따라 가벼운 당혹감부터 심각한 걱정까지

온갖 감정들을 생겨난다.

당연한 바로,

소통이 인간 관계와 인간 상호작용에서 일어날 때,

이해는 최대로 혼동은 최소로 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

토마스 호라가 자주 인용한 바를 여기서 반복하면: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그녀는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어야 한다.

누군가에 의해 이해되려면, 그/그녀는 그밖에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73].

 

혼동을 통상 그 주제 자체만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소통 연구자들은 특히 그렇다.

그것이 나쁜 것이다, 하면 그것은 제거된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소통의 거울 이미지이기에,

서로한테 다다르는데 있어 실패만이 아닌 성공에 관해서도 많은 걸 가르쳐 줄 수 있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은 혼동이 싹트기에 유달리 비옥한 분야다.

이는 평범한 번역 실수와 단순히 나쁜 번역들 그 이상을 의미한다.

더더욱 흥미로운 것은 같은 또는 비슷한 단어의 상이한 의미들로 야기된 혼동이다.

예를 들어, burro는 이태리어로는 “버터”를, 스페인어로는 “당나귀”를 뜻하는데,

적어도 스페인-이태리 농담들의 핵심 글귀에서,  기묘한 오해들을 일으키는 단어다.

chiavari(첫번째 a에 강세가 있다)는 이태리 리비에라 연안 지대에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며;

chiavare(두번째 a에 강세가 있다)는 성교를 가리키는 이태리 사투리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이태리어를 발음할 수 없는 관광객한테는

다소 상스러운 농담성 야유(pointe for jokes)를 던지는 것에 해당된다.

좀 더 심각하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은,  “현재”, “이번에”, 그리고 “이제까지”를 뜻하는  

(스페인어 actual, 이태리어 attuale, 독일어 aktuell도 동등한) 프랑스어 actuel를

그것과 발음이 같은 ("실제" 또는 "사실상"을 뜻하는) 영어 actual과 놀랄 정도로 빈번히 혼동하는 것이다.

프랑스어 eventuellement(스페인과 이탈리아어 eventualmente와 독일어 eventuell)도 마찬가지다:

이 단어는 (“결국” 또는 “마침내”를 뜻하는) 영어 eventually와 아무 관련이 없으며, 그 뜻은 “아마도”, “필시”다.

훨씬 더 심각한 경우는 번역자들이 수 단어 billion에 대해 빈번하게 저지르는 실수인데,

미국과 프랑스에서는 10억이지만, 영국과 유럽 대륙 대다수 나라들에서는 1조를 의미한다.

거기서 미국 10억은, miliardo, Milliarde, 등등으로 불리고 있다.

버터와 당나귀의 혼동으로 야기된 결과를 독자들은 사소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10억과 1조의 차이는, 핵물리학 교과서에서라면, 재난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의미 혼동은, 첨언하면, 창세기의 암시처럼, 인간한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 칼 폰 프리쉬의 선구적 탐구들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벌들한테는 복잡하고 능률적인 춤 “언어”가 있고, 이것으로 그들 종과 종은 구별된다.

그 종들은 근친교배가 불가능하기에, 그들 사이에 언어 혼동은 일어날 수 없다.

하지만, 몇 년전 폰 프리쉬가 발견한, 오스트리아와 이태리 벌들의 놀라운 예외가 있다[46].

그 벌들은 모두 같은 종으로 그래서 근친교배가 가능한 것들로, 같은 언어를 쓰는 반면, 

일정 메시지에 대해 각각 다른 뜻을 지닌 “방언들”을 쓰고 있었다.

벌이 먹이를 찾으면 벌통으로 돌아와 먹이 발견 경보를 울릴 뿐만 아니라

그 질과 위치를 구별케 하는 독특한 춤을 춘다.

폰 프리쉬는 세 가지 춤들이 있음을 발견했다:
   1. 꿀이 벌통 근처에 있으면, 둥근 춤(round dance)을 춘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번갈아 원을 그린다.
   2. 꿀이 중간 정도 거리에 있을 경우, 원형낫 춤(sickle dance)을 춘다; 

            8자를 납작하게 구부려 반원으로 만든 모양을 닯았다;

           낫의 열려진 쪽이 먹이가 있는 방향을 가리키고

           벌춤들에서 언제나 그러듯이 춤의 빠르기는 꿀의 질을 나타낸다.
   3. 꿀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 흔들기 춤(wagging dance)으로 벌통 동료들의 주의를 끈다;

           표적 방향으로 몇 센티미터를 직선으로 움직이다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반복한다;

           꿀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안 배를 흔든다. 

  
이태리 벌은 꿀이 40m 이상 떨어진 경우 흔들기 춤을 사용하지만,

오스트리아 벌한테 이 춤은 훨씬 더 먼 거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벌통의 이태리 동료가 제공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오스트리아 벌은

꿀 있는 곳을 너무 멀리 지나쳐서 먹이를 찾을 것이다.

반대로, 오스트리아 동료의 흔들기로 먹이에 대한 정보를 얻은 이태리 벌은

먹이에 전혀 미치지 못할 정도로만 날을 것이다.

벌 언어는 타고난 것이지 학습된 것들이 아니다.

폰 프리쉬가 오스트로-이탤리언 잡종을 만들어냈을 때, 그가 발견했던 것은,

잡종들 가운데 16마리는 몸무늬는 이태리 부모를 거의 닮았지만 "오스트리아 말을 썼다";

중간 거리를 가리키는 데에 66번 중 65번을 원형낫 춤을 추었다.

15마리의 오스트리아 부모를 닯은 잡종은 같은 거리를 가리키는 데에 둥근 춤을 49번 가운데 47번을 추었다.

달리 말해, 그 15마리는 “이태리어로 말했다”.


이러한 사례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몸말(body-language)을 사용할 때,

우리 인간도 정확히 같은 종류의 혼동에 빠진다는 점이다;

몸말은 전통을 거쳐 “물려받은” 것으로, 다른 문화 구성원이,

그것을 우리와 달리, 우리한테는 이상한, 또는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지 못할 경우, 우리한테 그것을 깨닫는 일이란 거의 있을 수 없다.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 안에 "프로그램된" 무수한 행동 패턴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들은 그 문화, 하위-문화, 그리고 가족 전통 속에서 그들이 자란 결과로,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2차적 의미에서 외부인과 같지 않다.

이를테면, 인사하기, 기쁨 또는 슬픔 표현하기는 상이한 문화들에 따라, 말 그대로,

수 백 가지 방식들이 있다고 인류학의 한 가지인 민속지학 연구자들은 말하고 있다.

소통의 기본 법칙들 가운데 하나로,

타인 앞에서 한 모든 행동은, 이들 사이 관계를 정의하고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메시지 가치를 갖는다.

모든 행동은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완전한 침묵이나 아무 반응이 없는 것도 “내 알 바 아니다”를 명백히 함의하고 있다.

이와 같기에, 혼동과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얼마나 많은 지 쉬이 알 수 있다. 

 

낯선 이들이 얼굴을 마주할 때, 문화에 따라, 일정한 거리 간격을 유지한다.

(나란히 서는 경우는 다르다; 대다수 문화에서 맨살이 아니라면 아주 가깝고 팔꿈치가 스쳐도 괜챦다.)

중부와 서부 유럽 그리고 북아메리카에서, 이 간격은 속담 표현처럼 팔 길이 정도며,

초대된 두 사람이 다가와서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는 것을 보면 쉽게 확인될 수 있다.

지중해 연안 나라들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이 간격은 훨씬 더 좁다. 그래서,

북, 남아메리카 사람 둘이 만나면, 그들이 적당한 간격이라 생각하는 지점에 서려고 한다.

남미 사람은 다가서고; 북미 사람은 무심결에 적절한 간격에 해당되는 지점으로 물러선다;

남미 사람은 불편한 거리라는 느낌이 들어 더 가까이 다가서고; 등등.

두 사람 모두 상대방이 뭔가 잘못 행동하고 있다고 느끼며,  상황을 "바로잡고자" 한다;

'한쪽의 교정 행동은 다른 쪽의 역교정을 불어일으킨다'는 전형적 인간 문제를 발생시킨다[183].

그들한테 그들 각각의 몸말을 번역해 줄 사람은, 거의 모든 경우, 그 주변 어디에도 없으므로,

그들은, 각자의 불편을 남의 탓으로 돌릴 것이기에,

꿀찾기에 성공하지 못한 벌들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에 대한 극(劇)적인 예는 레잉, 필립슨, 그리고 리의 책, '상호 지각'[81]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편과 아내가, 결혼 8년 후, 첫 부부싸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싸움은 신혼여행 이튿날 밤에 일어났다.

호텔 바에 앉아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옆에 앉은 한쌍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당황하리만큼, 그녀 남편은 냉담하고 우울하게 그리고

그녀와 다른 한쌍에 적대감을 품은 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심정을 알아차린 그녀는 난처해졌고,

자신을 “빼도박도 못하게” 한 것에 대해

남편한테 화를 내게 되었다. 

화가 치밀자,

각자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며

격렬하게 싸웠다.

 

8년이 지난, 현재, 그들은 자신들이 그때 “신혼여행” 상황에

전혀 다른 두 가지 해석으로 접근했음을 깨닫고 있다;

'이건  타자의 “말(language)"에서 또한 “당근” 같은 뜻이다' 라고 순진하게 가정하는 식으로.

아내한테, 신혼여행은 그녀가 새로 획득한 사회적 역할을 행할 최초의 기회였다:

“이전엔 아내로서 다른 부부와 대화했던 경험이 없었어요.

 그전까진 항상 “여자 친구” 또는 “약혼녀”, 또는 “딸”, 또는 “자매나 누이”였죠.”
  

하지만, “신혼여행”에 대한 남편의 해석은, 두 사람만이 함께할 수 있는 기간,

그의 말로, “그밖에 세상 사람들은 제쳐두고 오직 둘만이 서로를 알아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한테, 아내의 다른 부부와 대화는 그가 그녀를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는 걸 의미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번역 실수”를 지적할 수 있는 해석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입말(verbal language)을 대체로 의식적으로 사용하면서도, 말 그대로, 번역가는

(말인즉, 말해진 언어에서 다른 말로 의미를 옮기는 훈련을 받은 사람은)

해당 언어들 말고도 훨씬 많은 것들을 알아야 한다.

번역하기는 예술이며, 서투른 인간 번역가라도 실존하는 최고의 번역 기계보다도 훨씬 낫다.

하지만, 번역하기는 최고의 번역조차도 손실을 수반하기에 망치는 예술이다;

그 손실이란 객관적 정보의 손실이 아닌 언어의 무형의 정수(精髓)의 손실, 즉,

일대일 번역이란 있을 수 없는 해당 언어의 아름다움, 회화성, 은유들이다.

 

이태리의 유명한 속담, Traduttore, Traditore(번역자, 반역자)는 그 어려움을 그 자체로 명쾌하게 표현한 예다.

유명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이 일찍이 말한 것처럼,

이 경구를 영어로 “The translator is a traitor”와 같이 번역하면,

"단어를 약간 바꾸는 말-놀이(paranomasia)"의 가치는 탈각된다.

달리 말해, 그것은 정확한 번역이지만, 원래 뜻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추가적 문제는, 언어가 정보를 운반할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사실에 있다.

19세기 언어학자 빌헬름 폰 훔볼트는 일찍이 언급하기를,

서로 다른 언어들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언어들이란 각각의 상이한 바라보기, 즉, 조망들이다.  

이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경우는 이데올로기들이 충돌하는 국제회의에서다;

이때 언어를 말하는 해석자는 이데올로기가 자신을 절망 상태에 빠뜨렸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정확히 인민 민주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데땅트가 나토보다는 소비에트 어휘에서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하나이자 똑같은 것이 누구한테는 “해방”으로 다른 사람한테는 “노예화”로 불릴 수 있다.   

그래서, 사전 없이 순식간에 결정해야 하는 번역가는, 해석가는 더 자주,

아주 사소한 실수나 “명백하게” 하려는 좋은 의도로 야기된

엄청난 결말을 본의 아니게 촉발시킬 수 있다.

동양언어 해석가, 로버트 이크발 교수는 이에 대한 고전적 사례를 기술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극동의 매우 민감한 외교 협상에 참여했다.

 

1954년 여름, 한국에 대한 제네바 회담의 마지막 회의에서, 폴 헨리 스팍

북한, (주은래로 대표된) 중국, 그리고 소련의 비타협적 태도에 맞서 유엔을 대표하고 있었다.

 

스팍은, 유엔 제안에는 포괄성과 진심이 담겨 있으므로,

 여타 제안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 다음 발언으로 끝마쳤다:

“Cette déclaration est contenue dans notre texte.” [이 발언은 우리의 성명서에 있습니다.]

동시에 내 귀에 들린 영어 번역은 “이 발언은 휴전협정 성명서에 담겨 있습니다” 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으로,

해석자가 “dans notre texte”를 “dans l’autre texte”[또 다른 성명서에]로 듣고,

“l’autre”가 모호해서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휴전 협정”이라는 문구를 삽입해,

그 자신의 명확한 설명을 추가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사태는 심각해졌다.

주은래는, 중화 인민 공화국 대표단의 제안은 스팍의 말과는 달리  휴전협정서 어디에도 없음을 지적하며,

스팍이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폴 헨리 스팍은 일어난 모든 소란에 대해 분명 당황함이 섞인 그러나

온화한 관심을 표하는 초연함으로 주은래를 지켜보고 있었다. 또한,

새된 중국어 음절들을,  아마도, 프랑스어로는 정말 멋지게 말해져

뉘앙스를 갖춘 아름다움에 대한 괴상한 응답으로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낯설은 음절들의 의미를 기꺼이 배우고자,

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의 이어폰을 조정했다.

그러나 그 음절들의 의미가 중국어에서 영어를 거쳐 프랑스어로 건너가

마침내 그의 이해에 이르렀을 때,

분개해서 소리를 지르며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한 것은 이번에는 그였다.

 

스팍의 최초 발언을 프랑스어로 들었던 대표들은

주은래의 반응에 당황하고 있었다; 반면, 

“풍부한” 중국어 번역으로만 판단했던 이들(중국과 북한)한테

스팍의 분개는 분명 부적절한 것이었다.


번역의 실수는 계속 이어졌다.

스팍은 파멸적 단어 “휴전 협정”을 결코 말하지 않았음을 납득시키려 했고,

소통 붕괴의 여파로 자주 일어나는 일에서 보는 것처럼,

그와 그의 상대 모두,

사태를 설명해 최종적으로 분명히 하고 싶은 나머지,

서로를 제압하려 했다. 

그때 주은래가 말했다:

 

16개 유엔 회원국이 제출한 선언과 중화인민공화국 대표단이 제출한 최종 제안은,

몇몇 차이들에도, 16개 나라의 일방적 선언이 아닌 공통된 바램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왜 여기 제네바회담에 참석한 19개 나라들은 그 바램을 하나의 공동협정서로 표현할 수 없는가?         

 

이 발언에서 결정적 문구는 분명 이탤릭체로 표시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열기의 압박이 번역자들한테 가해지고 있었기에, 주은래의 해석자는

전체 발언을 제한하고 적합하게 만드는 이들 핵심 단어를 놓쳐 생략했다.

 

스팍한테, 프랑스어로 마지막에 들린 것은,

모두의 타결 갈망에 기반한 합의를 무(無)로 돌리는 핑계였다.

그것은, 필시, 그가 그토록 유창하게 방어했던 관점에 대한 

중국측의 뒤늦은 수용으로까지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는 마침내 주은래를 합당하게 설득시켰다고 여겼을 것이다.

열띤 오해들이 오가는 가운데 그의 생각은 냉정과 엄격함을 잃고,

그 또한 합리적임을 보이려는 열의에 차 말했다.

“En ce que me concerne et pour éviter toute doute,

je suis prêt à affirmer que j’accepte la proposition du délégué de la république chinoise.”

[내 관계하는 한, 그리고 여하한 의심도 떨칠 수 있도록,

나는 중국 대표단의 제의를 수락한다고 말할 준비가 되었다.]

 

그 결과, 장내는 들끓었고, 사태는 격렬한 혼동으로 빠져 들었다.

서구 세계의 위대한, 존경받는 지도자, 스팍은

자기편을 “거의(virtually)” 배반했다. 

- 에크발의 인용에 따르면 - 스팍은,

 

마지막 회의 이전에 아주 신중하게 도달했던

합의와 일치점에서 벗어나 적한테로 넘어갔다.

호주 수상 케이시, 필리핀 부통령 가르시아, 그리고

그밖에 대표들도 모두 발언권을 요청하고 있었다.

유엔대표단 수장, 베델 스미스 장군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려 했다:

발언권을 얻는 일과, 물리력을 동원해 남한 측 대표단을 머무르게 하는 일;

왜냐하면, 남한 측이 배신을 갑작스레 확신하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앤서니 이든 경은 사태 전개에 휩쓸린 채, 스팍이 굴복했지는 아니면

중국측의 예기치 않은 양보를 끌어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발언 요청한 많은 이들 가운데 누구한테 발언권을 줄 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그 또한 불확실성에 굴복한 것처럼 보였다.[38]   

 

이크발의 힌트에서 다만 알 수 있는 바;

그가 모든 언어들을 알고 있었기에,

필시 이 결정적 국제회의 총회 전과정에서 오직 그만이 ,

그 혼동의 기원들과 그에 이은 확대 과정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해석자의 역할이란, 에그발의 온당한 지적대로, “믿음직스런 메아리” 역할로 밀려나 있으며,

어떤 해석자한테도 회의 절차 과정에서 능동적 역할을 맡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물론, 협상이 자체로 잘 진행되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상당히 적절하다. 하지만,

소통의 흐름에 문제가 생긴 경우, 해석자는 의장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중개자처럼, 해석자한테는 눈에 띄지 않는 엄청난 권력이 있다.*

양쪽 모두 그를 필요로 하며, 어느 쪽도 (통상) 그를 제어할 수 없다.

믿음직스런 메이리 그 이상이고 싶은 유혹은 때때로 뿌리치기 힘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오스트리아군의 

한 파견대가 알바니아 한 마을에 진입했을 때에 일어난 옛 이야기다.

지휘관은 마을 사람들이 군의 요구에 전적으로 응하지 않을 경우

징벌을 가할 수 있는 명령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부대의 오스트리아인들 중 아무도 알바니아어를 아는 이가 없었고,

마을 사람들 누구도 그 군인들과 주고받을만큼 많은 언어를 알지 못했다.

마침내, 해석자를 한 명 찾아냈다. 그는, 

비엔나 동쪽 혹은 남쪽에 사는지에 따라 구별되는 기질들을

다루는 풍부한 전문적 식견을 어쩌다 타고난 사람이었다.

긴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그가 정확히 번역한 문장은 거의 없었다.

대신, 한쪽에는 사소한 협박은 뺀 채 듣고 싶은 것을,

다른 쪽에는 상대가 약속을 수용할 준비가 되었음을

양측에 전하는 일을 했다. 그러함으로써, 

양쪽은 상대가 매우 합리적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하여,

오스트리아 장교는 자신의 요구을 고집할 수가 없었고, 반면,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선제적 보복들이 괜한 짓이었음을 인정할 때까지

내버려 두었다; 이를 마을 사람들은 이별의 선물로 간주했다.  


전해지는 이 이야기가 벌어진 시점은 심리치료란 용어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 하지만,

해석자가 대처한 방식은 분명 심리치료적 성격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이 독자한테 편치 않게 보일 수도 있다;

이는 무의식적 마음을 탐구하며 통찰력을 얻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실상, 거짓들, 계산된 조작과 의도적 혼동으로 꾸며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들한테 물어보아야 할 더없이 중요한 질문이 있다:

어떤 상황이, 해석자의 개입 전이든 후든, 

더욱 혼란스럽고 그렇기에 "더 아픈"  상황인가?;

 정직/솔직은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가?

 

이후, 이러한 질문과 가능한 답들을 할 것이다. 그때, 

모든 것이 참이며 그것들의 반대 또한 참이라는 소통의 기묘한 맥락들을 검토할 것이다.

당장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소통에 대한 더 나은 이해는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루는 우리의 낡은 방식들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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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사례로 파르시스들이 있다.  이들은 이슬람의 진출로 자신들의 페르시아 고향에서 쫓겨난 후,

지금은 뭄바이에서 주로 거주하며 마라티어와 구자랏어를 필수로 배우고 쓰는 고립된 소수 사람들이다.

동인도 회사와 영국 총독부의 진출로, 그들은 영국과 식민지 사이 중개업자들, 특히, 원료공급자, 선박판매자,

무역업자, 등이 되었다.  그래서, 조그만 소수집단을 유지한 채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엄청난 영향력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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