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의 책과 논문들과 NHK의 번역을 모은 게시판

미국 사이버네틱스 협회 선언문**


** 아래는 이 문건의 관념들, 정식들, 그리고 비판적 제안들에 공헌한 이들이다: 스튜어트 움플레이(Stuart Umpleby), 폴 트라흐트만(Paul Trachtman), 래널프 그랜빌(Ranulph Glanville), 프란시스코 바렐라(Francisco Varela), 조셉 고괸(Joseph Goguen), 빌 렉마이어(Bill Reckmeyer), 하인츠 폰 푀르스터(Heinz von Foerster), 발렌틴 투르친(Valentin Turchin), 그리고 내 아내 샤롯(Charlotte). 그렇지만, 이러한 개관의 미치지-못한-것들에 대한 책임은 오직 나 혼자 져야할 것이다. 



사이버네틱스는 생각하기 방식이지 사실들의 수집이 아니다. 생각하기에는 개념들이 수반된다; 그것들을 형성하고 서로 관계시키는 일이 수반된다. 사이버네틱스를 특징짓는 개념들 몇몇은 오랫동안 드러나지 않은 채 혹은 드러난 채 여기저기 있었던 것들이다. 이를테면, 자기–규제와 제어, 자율과 커뮤니케이션은, 일상어에서 분명 새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어떤 과학에서도 중심-용어들로 부각된 적이 없었다.


    자기–규제(調節)은, BC 수백 년 전, 물시계들과 자기-되먹임 기름램프들에서 아무런 꾸밈없이 구동되었다. 하지만, 생명 유기체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이 개념이 도입된 것은 19세기 그리고 끌로드 베르나르의 작업에 이르러서였다. 심리학의 경우, 아직 갈 길이 멀며, 환경이나 유전자로 인해 전적으로 결정된다는 수동적 유기체 학설은 여전히 의심없이 빈번히 수용되고 있다.


    자율[autonomy: 나라, 지역, 조직, 개체(有機體)가 그밖에 것들의 통제 없이, 전적으로 자신의 원리(律)에 입각해서, 자결(自決), 자치(自治)하는 자유 또는 능력] 개념 또한 거의 같은 처지다. 이는 스파르타 시대부터 권세가와 정치가들이 썼던 것이다; 하지만 유기체의 자율을 창조하는 구조적, 기능적 평형화는 겨우 최근에야 연구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마투라나와 바렐라, 1980). 아울러 자율(自律) 개념에는 또 다른 면이 있다: 목하 바로 쓸 수 있는 것들로부터 시작 경영할 필요. 이러한 원리는 인간 지식 구성을 통제하며 따라서 모든 인식론의 근본임을, 18세기 초반 비코가 처음 제기했고, 이어 칸트가 강력히 논증했다 (2장을 보라). 이 원리가 함축하고 있는 것들은 오늘에 이르러서야 겨우 몇몇 과학들에서 추구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경우, 그 실상의 지나침은 아마 최고일 것이다. 뱀은 아담, 이브와 함께 창조된 후 서로 통했다는 말이 있다. 모세는 신과 통했다. 그리고 평범한 이들은 서로 함께 소통해왔다. 그럼에도, 커뮤니케이션(通信) 이론은 기껏 40년 전 사이버네틱스가 시작될 쯤에야 비로소 나왔다 (위너, 1948; 쉐넌, 1948). 하지만, 그때 그것은 아직 관찰자 이론이었고 통신 당사자의 의미가 발생하는 유일한 터(場)인 불가결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역사에 관해 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이버네틱스가 생겨난 것은, 유기체들 내부의 자기–규제(規制), 자율, 그리고 조직적, 기능적 위계 개념들이 이론적으로, 즉, 논리적, 수학적, 그리고 개념적으로 분석되면서부터였다. 이들 분석의 결과들은 여러 과학 분과들에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래서, 사이버네틱스는 초분과적인 것으로, 굉장히 많은 경험 영역들에서 새로운 이해하기 방식들을 가능케 하는 생각들과 개념 패턴들을 정제(精製)하여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학제적인 것과는 다르다.


    자기–규제, 자율, 그리고 위계적 배열들에 대한 탐구는, 순환적 인과성, 피드백, 평형, 적응, 제어 개념들을, 그리고 아마도 가장 중요한, 함수(機能), 시스템, 그리고 모델과 같은 개념들을 명확하게 구체화시켰다. 이 가운데 대다수 용어들은 통속적이며, 몇몇은 유행어가 되어 수많은 맥락들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들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라: 하나나 둘, 또는 설사 이 모든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만으로서 사이버네틱한 사고의 증거로 여기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사이버네틱스를 조성하는 것은, 오늘날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 학제간 분석에서 이들 용어들과 다듬어져 연합되었던 <개념들의 체계적 상호관계>다.


    무언가를 몇몇 요소들의 구체적 상호관계로 특정하게 될 때마다 그것을 묘사, 기술하는 것은 어렵다. 언어란 부득이하게 선형적(단방향)인 것이기 때문이다. 상호-관계된 복합체들은 선형적이지 않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개시하며 다듬고 증진시켰던 과학자들은 사이버네틱스를 각기 달리 기술할 것이며, 이를 각기 개별적으로 정의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들의 노력, 방법, 그리고 목표로 인해 자신들의 출발점이었던 전통적 분과들의 경계들을 넘었음을, 그럼에도 그들 사고에는 개별적 차이보다는 더 많은 중첩이 있음을, 그들 모두 충분히 알고 있다. 단어 '사이버네틱스'를 채택한 이는, 수학자, 엔지니어, 그리고 사회 철학자였던 노베르트 위너였다 (1948). 오래 전, 암페르가 이것을 통치(政府)에 대한 학(學)에 쓰자고 제안했던 것은, 이것이 ‘조타수’라는 그리스 단어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다. 위너는, 대신, 사이버네틱스를 ‘동물과 기계에서 제어와 통신’에 대한 학으로 정의했다. 신경 해부학자, 논리학자, 그리고 철학자였던 워렌 맥컬록한테, 사이버네틱스는 <관찰자 내부에서 케뮤니케이션 그리고 관찰자와 환경 사이 커뮤니케이션을 거쳐 지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문제로 삼는 실험적 인식론이었다. 산업분석가이자 경영상담가였던 스태포드 비어는 사이버네틱스를 효과적 조직에 대한 학으로 정의했다.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과학이 이전에는 물질과 에너지를 다루었음에 반해 새로운 과학, 사이버네틱스는 형식과 패턴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교육 이론가, 고든 파스크한테, 사이버네틱스는 방어 가능한 은유들을 솜씨 있게 처리하기, 말인즉, 이러한 은유들이 어떻게 구성될 수 있으며 이들 구성의 결과로 무엇이 추론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술이다. 그리고 우리는 장 삐아제가 사이버네틱스를, 그의 생 후반, 인간 마음의 인지적 적응 모델을 만들려는 시도로 보았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다.


    사이버네틱스의 주요한 두 방향은 시작부터 나란히 유지되어 왔다. 하나는 피드백과 순환적 인과성을 쓰는 자기–조절(規制) 메커니즘들에 기초를 둔 기술발달을 구상하고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이 방향의 결과들에는 산업용 로봇, 자동항법장치, 모든 종류의 여타 자동 장치들, 그리고 두말할 것도 없이 컴퓨터가 있다. 컴퓨터는, 연이어, 다소 지적인 과정들에 대한 기능적 모델들의 발달을 이끌고 있다. 이는 인공지능 분야를 창출했으며, 오늘날 이 분야는 문제 풀기, 정리 증명하기, 수 이론, 그리고 논리학과 수학의 여타 영역들의 체계적 연구들뿐만 아니라, 추론 과정들, 의미론적 네트워크, 그리고 체스 게임과 자연어 해석 같은 기량들에 대한 복잡한 모델들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이러한 핵심적인 실용적 방향의 또 다른 결과들은 경영 이론과 정치학에서 달성되었다. 이들 두 분과에서 사이버네틱스는 제어자와 피제어자들, 그리고 통치기구와 피통치자들 사이 관계들을 선명하게 보여주며 체계화하는 정교한 원리들을 다듬어 왔으며, 그래서, 규제와 제어에 대한 잘 정의된 이론들은, 오늘날, 그 기초를 갖게 되었다 (애쉬비, 1952; 코넌트, 1981; 파워스, 1973).


    다른 하나의 방향은, 지식에 대해 일반적으로 인간들이 품고 있는 의문에 집중되었으며, 그 의문을 자기–조직화라는 개념적 프레임워크(作業構造)에서 다룸으로써, 한편으로는, 생명 유기체의 인지 과정에 대한 포괄적 생물학을(마투라나와 바렐라, 1980),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아론의 터무니없는 점들과 실재론의 치명적 모순들을 성공리에 회피한 지식 구성 이론을 산출했다 (폰 푀르스터, 1973; 맥컬록, 1970; 글라저스펠트, 1976b).


    우리가 어떻게 알게 되는지 알려는 그 어떤 시도도 명백히 자기–지시적이다. 전통적 철학과 논리학에서, 자기-지시(再歸-準據)에 대한 천박한 표명들은 항상 변칙, 역설, 혹은 단지 우수한 형식의 파괴로 간주되어 왔다. 그럼에도, 몇몇 영역들에서, 어떤 상태가 그 자체를 산출하는 과정들은 정련, 사용됨으로써 공식적으로 표명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은 극히 유용한 것들로 입증되었다 (이를테면, 재귀함수 이론의 고유치들, 포앙카레한테서 얻은 몇몇 위상학적 모델들, 논리학에서 축약 규칙들, 그리고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들에서, 특히, 지식 공학이나 전문가 시스템의 비수치적 계산들에 응용하는 프로그램 언어들에서, 몇몇 옵션들). 자기-지시 형식의 취급 과정은 스펜서 브라운의 지시 연산(1973)에서 극적 진전을 이루었으며, 이 연산에서 구별(區別)하기는 형식논리의 관계들을 포함하는, 기술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관계들의 기초(基礎)로 이해된다. 이러한 토대에서 진행되어 다양한 수학 부문들로 확장된 최근의 연구들은 자기-지시 현상을 새롭게 조망하고 있다 (바렐라, 1975; 고괸, 1975; 카우프만, 1987).


    자기-지시(self–reference)의 인식론적 함의들은, 과학철학에 대해 사이버네틱스로 접근하는 경우 한층 광범위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여기서, 전통 과학의 도그마에 속하는 신조 하나와 충돌한다: ‘과학적 기술(記術)과 설명들은, 그 어떤 관찰자와도 무관한, 자체로 실존하는 객관적 실재의 구조를 추정해야 하며, 실상, 그럴 수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그 토대에, 자기–규제(調節), 자율, 그리고 인지적 유기체의 정보 폐쇄성이라는 아이디어(觀念)들을 깔고 있기에, 대안적 조망을 북돋는다. 이러한 조망에서, 현실(reality)이란, 관찰자와 관찰된–것이 한 쌍으로 상호의존하기에, 쌍방향적으로 구상된 것이다. 하인츠 폰 푀르스터의 말대로, 전통적 의미에서 객관성은, 생리적 맹점에 상응하는, 인지적 맹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있지-않는(모르는) 것은 보고-있지-않다(모른다). 객관성은 특정 주체 없이 관찰하기가 행해질 수 있다는 그 주체의 망상이다. 객관성 갈구하기/끌어대기는 책임감 폐기하기다 – 고로 인기가 있다. 


    ‘관찰자와 관찰된-것’ 문제들은, 사회과학에서, 이해하기라는 생각(觀念)의 창발과 함께 표면화되었다. 인류학에서는, 이를테면, 낯선 문화 구조 분석하기는, 그 문화를 창조했던 개념 구조들에 입각해서 그 문화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이 없다면, 하나마나한 일이라는 각성이 있었다. 비슷하게, 외국 문헌 또는 역사 문헌 연구에서, 해석학적 접근 역시 기반을 다지고 있다. 여기서도, 재차, 그 목표는 그 당시 저자 공간의 개념들과 개념적 풍조(風潮)에 입각해서 의미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비록 전통주의자들이 이를 과학적이라 칭하는 걸 주저할지라도 이들 분과들에서 창발하고 있는 태도는 사이버네틱스의 사고와 일치한다.


    그렇지만, 사이버네틱스 연구자들을 객관성 도그마에서 일탈하도록 북돋는 가장 강력한 확증은 과학의 가장 견고한 것들에서 나온다. 물리학에서, 관찰자 문제는 20세기 초에 대두되었다. 상대성 이론들과 양자역학이 제기한 가장 직접적 의문은, 그것들이 객관적 실재에 속하는 것들인지, 그보다는, 관찰에 의해 결정된 세계에 속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사실인지 하는 것이었다. 한 동안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실재론적 해석이 최종적으로 우주는 동질 배열 상태라는 견해로 이어지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하이젠베르크와 보어는 이와는 다른 방향을 취했다. 길고긴 일련의 입자 실험들 가운데 가장 최근 실험들은 실재론의 승산을 줄여왔다. 여기 맥락에서 실재론이란, 누군가 입자들을 관찰하기 전에도 그것들은 관찰되고 있다는 신념이다. 물리학에는, 물론, 끝이 없을 것이다. 새로운 모델들이 구상될 수 있으며, 객관적이자 관찰자와는 독립된 실재라는 관념이 재차 전면에 나설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 물리학 이론과 실험들은 사이버네틱스 연구자들의 견해를 확증하고 있다: 즉, 지식은 객관적인 실재의 그림으로 여겨져서는 안 되며, 그렇기보다는, 경험을 조직하는 특정 방식으로 여겨져야 한다.


    시작된 이래 수 십 년에 걸쳐, 사이버네틱스는 공학과 기술 분야의 많은 영역들에 혁명을 일으켰다. 자기–규제(規制)은 냉장고부터 시작해 우리가 모는 자동차와 우리가 타고나는 비행기에서도 작동하고 있다. 이것은 인공위성 발사와 우리 태양계의 ‘탐색 위성들'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또한, 우리한테 유도(目標追跡) 미사일들을 장착시켰으며, 이어 축복과 위험들을 동반한 컴퓨터 시대를 일으켰다.


    우리 대다수한테는, 그렇지만, 이러한 장치들의 폭발적 증가가 가장 중시되는 특징은 아니다. 바퀴, 전기의 동력화, 방부제와 인쇄기의 발명들은 생활의 기계적 영역에서 모두 비슷한 효과들을 갖고 있다. 사이버네틱스는 훨씬 더 근본적인 잠재력을 갖고 있다. ‘자기–규제’, ‘자율’, 그리고 ‘상호작용을 거치는 적응’과 같은 사이버네틱스 개념들이 서양 문명 역사 최초로 제공한 것은, 바로, 인간 개체, 집단, 그리고 사회들 사이에 역동적 평형을 성취할 수 있는 엄격한 이론적 기초다. 오늘날 세상을 주시하면, 경쟁과 갈등을 조장하며 부추기기보다는 적응과 협력을 의도적으로 겨누는 생각하기 방식만이 이 혹성에서 인간 삶(生命)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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