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cal Constructivism: 알기와 배우기의 한 방식(1995)에 대한 NHK의 주석 게시판

이어, 칸트는 신의 실존을 합리적으로 증명하고자 한 이전의 모든 시도를 체계적으로 무너뜨렸다. 하지만, 그는 신의 부존(不存)에 대한 합리적 증명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고, 고로, 신앙인들은 신 실존에 대한 부인 불가능성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1787, pp.770, 781). 물-그-자체의 경우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는 강변(强辯)하기를: 세상에 대한 전능한 창조주를 당연시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불가결하다; 하지만, 그 창조주가 우리 지식에 추가되지 않는 건, ‘그것 자체로는 무엇일지에 대해 여하한 구상도 할 수 없는 바’에 대해 무언가를 전제(當然視)하는 것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이다 (pp.725–6).


에서,


물-그-자체 또는 누머논과 같은 발견적 허구를 상정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이유는,

우리 경험에 기초한 구성적 세계가 유아론으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다;

도구적, 목적적 필요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능한 창조주를 합리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당연시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 때문인가? 우리 일상에서 그 이유가 무엇인가?


만약, 일상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은 창조주와 물-그-자체나 누머논과 동의어가 되는 바,

창조주는 물신 그 자체가 된다; 그래서, 오늘날,

확립된 종교와 물신주의가 동의어가 된 것일까?


이어,

일상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칸트의 경우, 전혀 찾을 수 없을 것인 바,

마지막 하나, 

정말 신비한 것에 대한 존재의 정당화를 위한 것이라면,

굳이, 그것은 '창조주'라 지시할 필요도, 또는

그 어떤 종교의 '신'을 지시할 필요도 없다.


그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어찌 할 수는 없지만,

우리한테 제약과 가능성의 세상으로 나타나는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 이상이 필요치 않다는 것,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이라는 점을,

그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을까?

 


회원:
8
새 글:
0
등록일:
2014.06.19

오늘:
19
어제:
116
전체:
298,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