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cal Constructivism: 알기와 배우기의 한 방식(1995)에 대한 NHK의 주석 게시판

형이상학, <사유로 세상을 통째로 구상하려는 시도>의 발전은, 처음부터, 사람들을 한편으론 신비주의로 몰아가고 다른 한편으론 과학으로 몰아가는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인간 충동의 융합과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철학자였던 가장 위대한 사람들은 과학과 신비주의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둘을 조화시키려는 시도는, 그들 삶이 되었고, 극도의 불확실성을 타개하고자, 그들 몇몇한테는 철학을 언제나 과학이나 종교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과업(課業)이 되었다. (Russel, 1917/1986, p.20)


하지만, 그러한 융합 시도가 합리적 작업이 되리라는 점엔 동의하지 않는다. 나한테, 진정 신비한 것은 이성으로 파악(把握)될 수는 없다. 이는 가치에 대한 부정도 판단도 아닌, 그저, 신비란 이성이라는 자르기 도구 아래 쇄락하고 있는 닫힌 지혜 영역이라는 확신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성의 목적(存在-理由)은 분석이다. 이성이 다루는 건 무엇이든 명백한 차이들에 입각해 기술(記述)되는, 따라서, ‘과 관계들로 표현되어야 한다. 신비가 통째로 다루는 세상은, 어떤 배경에서 어떤 분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체다. 신비적 표현들에서 부분들이 언급될 때, 그러한 은유들로 발생시키고자 한 공감(共感)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생각이다.

RC는 실재 세상을 기술하려는 형이상학이 아닌 합리적 알기 모델로 의도된 것이다. 내가, 이성의 활동 범위를 제한코자 하는 RC의 노력을, RC의 미덕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는 건, 이러한 제한으로 <신비주의자의 지혜 권역(權域) 명상>할 필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에서,

러셀은 형이상학의 기원에 대해서는 명확히 했지만, 
RC의 저자, 폰 글라저스펠트는,
그것이 형이상학이 합리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은, 신비 영역이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그럴싸한 은유적 표현일 것이고, 
해서, 그러한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여타 시적 은유들과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하지만, 시적 은유와 같은 부류가 이성의 합리적 탈을 쓰고 출연할 때마다,
야기되는 폐단들은 종교와 정치, 그리고 사회 문화 영역에서 권력의 억압적 기초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 그리고 저항하는 자는 익히 알고 있는 바다. 

* 위에서, ‘닫힌(closed)’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 
먼저, 표기한 대로 그러한 신비적 은유는 이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한 합리적 상호이해 대상이 아닌 
표현한 이, 그리고 그에 공감한 이, 각각 그 자체로 배타적인, 말인즉, 전적으로 사적인 것이라는 점,
그래서, 우리가 합리적인 것들이 갖는 도구로서 작동(working)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점, 
마지막으로, 두 번째 해석에 따라, 더 이상 우리 세상에서 통용되는 영역(領域)일 수는 없게 되었다는, 
말인즉, 폐점된 영역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 이성의 자르기와 붙잡기 깜냥은, 주의의 깜냥이기도 하다
잘라낸 걸 붙잡는 것은 이성(理性)이지만, 그러한 붙잡기의 연장인,
붙잡은 것들을 정렬,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이해하기(悟性)이다.

RC의 미덕들로는, 당장 생각나는 것들로. 
RC는 진리(眞理)가 아니기에, 
자기 말이 안 먹힌다고 화(嗔) 낼 일은 있어도 화(瞋) 날 일은 없다는 것, 말인즉, 
권력 지향성을 육성하는 대신, ‘바이어빌리티’에서 보듯, 
자율적 개체 삶의 적응과 확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소위, <지족, 안분, 지지>의 자율적 동적 평형을 추구하는 것, 
그럼에도, 
그것에 대한 제약들이 존재한다는 것에서, 작동 가능성을 명확히 한다는 것
(이것에는, 조건 ‘if it works’가 반드시 붙는 ‘Let it go’나 ‘Anything goes’라는 것),
그래서, 
특히, 타자들의 존재에서, 
이를테면, <Don’t say, “You should ~”, just say “I should~>와 같은 문화적 규범들을 정당화 하는 것, 
이에 기반하여, 
이해하기의 이해하기를 타자들과 협력에서 요청되는 필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로써, 
민주주의는 폭력이 함의된 다수결이 아닌 상호 이해에 기반한 ‘합의’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 등등 ... 
수없이 많지만, 
여기 언급된 신비의 최소화라는 미덕으로, 
모든 형이상학과 신비들, 그것들에 기대 존재 이유를 정당화 하는 
체제 종교들의 인습적 관행과 비합리, 불합리적 기만들을 파악, 회피할 수 있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은, 
더없는 미덕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사회 구성, 즉, 타자들과 삶의 형식을 창발해가는 과정에서, 
이들 장애를 우회할 수 있음으로 해서, 
보다 적응적이며 실효적인 그리고 장기 지속 가능한 인간 삶의 양식을 창발할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  
마지막, 
이상의 실용적 미덕들을 능가하는 미덕으로,
신비의 최소화와 함께 합리적 영역과 신비 영역을 분리한 것의 귀결로서 획득되는 미덕은, 
일상을 신비로운 시선으로 대하도록 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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