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dical Constructivism: 알기와 배우기의 한 방식(1995)에 대한 NHK의 주석 게시판
일상 용법에서, 단어들은 경험의 요소들 그리고 경험에서 추상된 개념들을 가리키고자 한다. 은유적 용법에서, 그것들은 경험 너머 상상의 세상을 가리키고자 한다. 후자는 시인과 신비주의자들의 양식(樣式)이다. 버나드 쇼는 이를 그의 성 잔다르크에서 반대 심문 가운데 몇 줄로 더없이 멋지게 기술했다:   

잔: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대해 따지지 말라.    
로버트 (심문자): 무슨 말이냐?  그 소리라는 게?
잔: 내가 할 일을 전하는 소리다. 하나님한테서 오는 것이다.
로버트: 그건 너의 상상력에서 나온 거다. 
잔: 맞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가 우리한테 오는 방식이다.
        (Shaw, St. Joan 1923, Scene I)

역사에서, 
개신교의 출현으로,
카톨릭의 신부들의 
하나님과 일반 사람들을 매개하는 역할에 대한 거부는, 
이 절의 쟌다르크의 일화에서 보듯이, 
그 자체로 혁명적 전환이다. 

하지만, 이 일화에는 
단지 하나님(God)과 그 어떤 인간 또는 사물도 매개되지 않는 
인간의 직접적 접촉 가능성이라 여겨지는 것, 
그 이상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합리적 접근이 아닌, 
아니 그 어떤 접근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신의 경험의 실패와 갈등을 통해서, 
그로부터 일어나는 상상으로서만, 고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전적으로 사적인, 합리적-생각(觀念)이 아닌, 
그러리라 여기는, 선택의 순간, 전적으로 스스로 책임일 수밖에 없는 검증 불가능한 
상상적-추정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쟌은 심문자에게, 
내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따지지 말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네가 묻는다면, 
이리 답할 수밖에 없다는 말로 가름하는 것이다 
– 여기서, God를 하나님이라 부르든, 천주라 부르든, 
하느님이라 부르든, 혹은 종파를 달리해 하늘님이라 부르든,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태도는, 
경험 너머 세상에 대한,
실재하는 세상에 대한,
구성론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다;
실재가 신 또는 하늘님으로 대체된 것일 뿐이다.

이로써,
버나드 쇼가 '잔다르크에 대한 심문' 장면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실상,
신이나 하나님에 대한 것, 즉, 신앙의 어떤 형식이라기보다는, 맥락상, 
그러한 외피를 쓰고 개인의 선택,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형식이다; 
내가 해야만 하는 것으로 선택했던 것, 그에 따라,
내가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것에 대해, 자신 이외에,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오늘날, 가끔씩,
주요 확립된 종교들이 공적 공간에서,
반성을 강요하는 "모든 게 내 탓이요"라는 슬로건은,
 일반 사람들한테, 자신들의 행위 구역을 넘어선 사건들에 대해서,
"아~, 이건 내 탓이야"라는 저주를 공적으로 확산시킴으로써,
정작 해당 행위 또는 실행과 관련된, 통상, 
권력 있는, 이들을 보호하는,
주술사들의 퍼포먼스 그 이상이 아니다;
그 퍼포먼스로, 쟌의 맥락과는 달리, 그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자신들의 변화, 실행에 대한
의무에서 방임의 권리를 얻는 것은 물론,
심문 당하지 않을 면죄부까지 얻으며, 그리고,
처절한 반성의 기회까지 가볍게 날린다.
 

한발 더 나아가,
확립된 주요 종교들은, 일반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주문들이 잘 먹혀드는 생각하기 방식을 장려한다; 
그것은 자율에 기초한 구성론적 방식보다는
소박 실재론이나 식자들의 경우에는 비판적 실재론이 그것이다;
복잡한 현실에서 소박하고 순박한 것들을 동경하게 하고,
그를 넘어선 자들한테는 그들 지식의 권위와 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신, 또는 절대자의 실재성과 
그 실재성에 대한 접근권을 갖는 
종교의 권위과 권력 유지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것은,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를 믿는 <소박 실재론적 인지 모델>의 현상-유지다.
이는, 사회, 문화, 정치, 경제 영역에서, 
특정 현존-모델을 유지하기 위한 현존 권력이 
<자율성과 창발성을 끌어내는 인지-모델>에 사람들이 
호의적이며 열정적이기를 바랄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후자와 관련하여, 오늘날,
성공한 과학적 관행의 힘을 빌어, 
- 특히, 카톨릭 또는 저열한 개신교 신앙 문화를 제물로 삼아, - 
일반 사람들의 실재론적 사고 모델을 유지, 육성, 강화하는 조류가 있다;
'종교 전쟁'이라는 전선에서 복무하는 과학의 전투사들이 그들이다.

하지만, 주요 확립된 종교든, 과학의 전투사들이든, 그들이,
절대, 보편, 객관, 진리, 죽음과 같은 생기을 앗아가는 기만적 관념들로,  
상대, 일반, 주관, 도구, 생명과 같은 실제 관념들에 우위를 점함으로써
그러한 관념들에 대한 독점권을 주장하는 목적은,
<“감당 불가하게 커져” 붕괴만이 유일한 선제적 해결책이 되어버린> 
국가, 사회, 정치, 경제 권력에 대한 오늘날 점증하는 해체 압력에 저항하고자, 
붕괴되고 있는 그들 기초를 좀비들로 채워, 
권력의 현상 유지에 복무하려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이러한 바에 맞서, 
식자층에서 빈번히 보이는 <합리적 영역에서 혼란스런 담화 유포>와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경쟁하는 <신비적 영역에서 합리성을 가장한 단언들>이, 
인간의 개체로서-주체의-자율성-자각과-회복(解放)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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