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형이상학은 철학 분과에 속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형이상학은 보통 저-세상/사후(死後)에 관련 개입한다. 이-세상을 구성하는 특정 합리적 조작/구성을 저-세상으로 연장시킨 상상물을 기초로 하든, 그 합리적 구조에 그 상상물을 끼워 첨부하든, 그렇게 '이'와 '저'를 거론, 통합한 학적 구조물을 우리는 통상 '형이상학'이라 부른다.

모든 문화는, 명시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와 같은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 역사가 깊은 확립된 종교에서부터 조그만 종교 집단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형이상학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을 구성한다.

모든 개개인들 또한, 일관되지 않고 산발적이며 지속적으로 수정되지만, 이러한 형이상학적 구조들을 가지고 있다. 특정 문화에 속해 자랐으며, 자의든 타의든 특정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이-세상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자기 견해는 필히 저-세상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질문을 수반한다. 의견들이 상충되는 가운데, 의견이란 독단을 쉬이 허용함으로써, 개개인들의 견해는 그럴듯한 확립된 형이상학들로 수렴된다.

제 아무리 개체의 자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부여하며, 개인의 자유 또는 영혼의 자유를 위해 살아간다 하더라도, 자신의 형이상학의 자율적 성장을 유지하며, 타인의 형이상학의 자율적 성장을 북돋지 아니한다면, 우리 세상을 피폐시키고 있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적 권력들을 떠받치고 재생산하고 있는 근원적 권력 생산 형식, 확립된 형이상학의 재생산에, 알게 모르게 기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율적 형이상학'이 뜻하는 바는, 이-세상에 확립된, 즉, 함께 공유할, 또는 '학'으로서 상호 자율성을 북돋는 그런 형이상학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확립된 모든 형이상학은 알 수 없는 저-세상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그로부터 도출된 구조, 원리, 규범 따위를 사람들한테 ‘진리’라는 이름으로 강제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과 그 '알기'로써 저-세상에 대해 우리가 지닐 수 있는 태도만을 밝힘으로써, 말인즉, 저-세상을 이-세상의 ‘귀결(歸結)’로서만 한정지움으로써, 개인들의 자율적 형이상학의 성장을 도울 수 있을 뿐이다. 아이한테 동화를 통해, 청소년들한테 과학적 상상력을 통해, 실패와 절망을 경험한 어른들한테는 반성을 통해, 무수한 '방편(方便)'들을 경유하며 그러나 어디에도 잡히지 않음으로써, '이'와 '저'를 하나로 경험하며, 자기 삶의 완전한 자치를 통해, 나와 우리가 유리되지 않는 삶을 북돋을 뿐이다. 이 과정의 최종적 귀결은 자율적으로 성장하던 형이상학의 폐절(廢絶)이다. 저-세상을 대상으로서 독립적으로 묘사, 기술할 수 없음에 대한 깨달음이다. 

이렇듯, 본디, 형이상학이 지닌 의미와 '자율적'은 어울리지 않는다. 형용모순이다. 하지만, 원초적 권력 생산 도구로서 유통되는 형이상학들이 사라지기 전까지 이 형용모순은 이 사멸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도구로써 쓰일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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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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