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체(sieve)와 관련된 인식론 분류
2014.04.14 20:52
관찰자가 보기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유기체는 생존할 수 없다.
종을 거칠게 정의하면, 계속된 환경 변화에 적응한 살아남은 개체나 개체들 사이 재생산이 가능한 집단, 또는 유전자적 유사성에 기초해 유사한 특정 특징들로 분류된 개체 집단을 가리킨다.
계속된 환경 변화에서 선택된 유전자나 특징(또는 적응한 개체)이 선택받지 않은 유전자나 특징(또는 다른 개체)에 비해 또 다른 환경에서 보다 선택적이다(혹은 적응적이다) 하는 점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말인즉, 더 우수하다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진화나 진보가 개체 중심이 아닌 종 혹은 사회를 중심에 둔 개념임을 알아챌 수도 있다.
<자연선택은 실제 개체 선택이며, 종의 진화란 통시적 관점의 관찰자의 설명이다.>
관찰자는 관찰 대상을 바라보며 대상을 둘러싼 환경을 자연이라 칭한다. 이 때의 자연은 유기체의 자연이지 관찰자의 자연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자연을 유기체는 인지할 수 없다.
관찰자는, 관찰과 연구가 진행 중인 한, 유기체의 환경을 주어진 실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연구가 끝나고 되돌아보는 순간, 그 환경 또한 관찰자의 구성물이었음을 깨닫는다.
살아남아야 하는 개체, 유기체의 관점에서, 개체는 개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인지할 수 없기에, 관찰자와 같은 전지적 관점을 취할 수 없다. 따라서, 개체가 인지, 구성하는 환경은 관찰자가 구성, 관찰하는 환경과 같을 수 없는,아울러 관찰자가 볼 수 없는 개체의 내적 환경이다.
일정 기간 생존이 그 이후 기간의 생존을 보증하지 않듯이, 이전 생존에 기능했던 유전자가 그 이후 생존에 유효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테면,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전자가 일정 기간은 생존에 유리할 수 있지만, 동시에 스트레스로 살아남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개체란 에너지 차원에서는 열려 있으나 정보 차원에서는 닫힌 시스템이다. 개체한테, 자신을 걸러낼 수도 있는 '자연'이란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지각이란 시공간을 필요하며, 시공간 또한 개체 자신의 구성물이다.)
자신을 개체로서 자각함으로써, 자신이 지각하고 생각하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구성물에 다름 아님을 깨달은 순간, 통상 자연이라 말하는 것은 개체 혹은 우리의 내적 환경이며, 그 자연은 더 이상 개체를 걸러낼 수 있을 자연선택의 ‘자연’은 아닌 것이다. 혹자는 가끔 이 후자의 자연을 ‘대자연’이라 칭해 구별하기도 한다.
개체 혹은 유기체가 이 '자연'을 신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자연'은 인간의 그 어떤 '설명'에도 오로지 '아니오'로만 대답한다. 말인즉, 그 어떤 설명에도 그 진리성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주지 않는다.
이 '자연'에 대한 그 어떤 '과학적 설명'도 예외가 아니다. 달리 말해, '과학적' 지식은 이 '자연'의 체 혹은 제약에 걸리지 않고 생존한 개체의 지식이다. 즉, 이 ‘자연’과 관련하여 과학적 지식이란, 알레고리 또는 상상으로서, '자연의 체'에 걸려들어 작동불능으로 제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이상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자연'이 있다는 직접적 증거를 구할 수는 없지만,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결론의 귀결로, 이'자연'에 대한 여하한 합리적, 이성적 접근은 불가하다.
그렇다면, 이 '자연'에 대한 감성적, 신비적, 영적 접근은 가능할까? 답은 '아니오'다. 왜냐? 언급했듯이, 감성, 신비적 사고, 영성에 대한 사고 또한 여하튼 최소 자아의 조작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기에 이 ‘자연’에 대한 여하한 접근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개체 혹은 유기체의 지식이 이 ‘자연’의 체에 걸렸다는 것을 통해서만 부정적으로 이 ‘자연’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실상, 이 ‘자연’에 대한 이러한 알아차림은 우리가 '인간에 대해 수단이 아닌 그 자체 목적으로 접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생각하기 주체는 자신이 속한 개체가 살아 있는 한, 개체를 벗어날 수 없다. 그 주체, 에이젼트 혹은 최소 자아는 여하한 조작에든 실려야만 최소한의 정보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혼돈된 이미지, 감각적 미세 요소들, 전에 없던 감각 생성 조작 경험들 또한 조작적 과정이다.
해서, 분류하자면,
1. 관찰자의 자연이 이 '자연'에 다름아니라고 여기거나 우기는 어린이나 다 큰 어른을 볼 수 있다; 소박 실재론(naive realism)
2. 관찰자의 자연이 이 '자연'에 대한 확률적 가능성을 갖는 설명이라고 여기는 다단계 '사기'에 넘어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비판적 실재론과 그 추종자들(critical realism & followers)
3. 이 '자연'에 대한 영적(또는 최소 자아의) 의탁을 시도하는 신비주의 분파들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 신비주의
4. 이 '자연'은 허구이며, 발견을 위한 허구도 아닌 그저 이러한 설명을 하기 위한 '설명적 허구' 이상이 아니라고,따라서, 그 '자연'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아론(solipsism)
5. 4의 입장에서 '설명적 허구'는 취하되, 덧붙여, 이 '자연' 비슷한 것들이 부정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음이 우리가 구성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저 구성물 이상으로 여기게 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한다; 구성론(constructiv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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