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섬에서 비약으로 진보란?

2014.04.14 20:51

나공 조회 수:561

진보가 반자본, 반국가, 반종교에 머물며 어기적 거리면 이데올로기로 불린다. 왜냐? 자본, 국가, 종교는 현실적 체제이다. 싫다해도 더없이 공고한 체제다. 공고한 강력한 그 무엇 앞에서 어기적거리는 건 두 경우밖에 없다. 알랑거려 콩고물 좀 얻어먹든지, 속내를 들켜 제거되든지. 전자를 비판적 이데올로기라 하고, 후자를 반체제 이데올로기라 한다.

체제의 구성 요소들은 각기 자기 본연의 역할을 갖고 있다. 자본은 오늘날 인간사 생산 시스템의 주축을 이룬다. 국가는 생산시스템에 걸맞는 정치 사회 통제를 행한다. 종교는 자본과 국가를 옹호하며 그것들이 팽개친 이들을 어루만진다.

우리는 이들이 더 이상 커질 수 없는 크기에 도달한 상태에서 이들의 막장 상황들을 지켜보고 있다. 즉, 그들 본연의 역할 그 자체까지도 부정하는 수많은 사례들은, 자연, 이미 구성된, 회자되고 있는 반테제들이다.

자본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의 지속을 위한 생산과정이기를 포기했다. 국가는 망나니 금융자본과 독점적 기업들의 하수인임을 완벽히 입증하고 있다. 종교는 과학과 화폐의 공격에 알량한 지혜마저 망각하고 희생자들을 마지막으로 거덜낸다.

반테제로서, 반자본, 반국가, 반종교는 이미 주장이 아닌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정상-상태의 복원을 기원하는 이들한테 반테제들의 국가권력 쟁탈 이데올로기로서 성공은 신권력의 출현이요, 구기득권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는 이미 역사에서 경험한 바, 반테제들은 갱신된 이데올로기로 가뿐히 무력화된다. 소비주의와 결합된 사회적 층위에서 내탓주의의 광범위한 유포 확산이 그것이다. 자살 권하는 사회다. 

공공영역에서 사실들로서 반테제들을 반복하는 것은, 또 다른 다른 관점에서,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 목적 없는 언동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로서 반테제는 이미 테제의 지위를 얻었기 때문이다. 사실에 대한 분석은 반성의 기초를 제공하며 대안을 찾는 첫단계이기 때문에 해결점을 함께 찾아가는 여정이 없다면, 이미 테제가 된 한물간 반테제를 반복하는 현상 유지 이데올로기는, 그 극한점에 이르러, 개인들의 반성과 해방의 에너지를 증오와 파괴로 이끄는 것은 물론 최종적으로 몽롱한 군중을 오웰의 1984와 같은 세상으로 휩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서, 맞서는, 통상, 진보란, 현실에서 왕성한 반테제들로부터 일어나는 개인들의 반성과 이를 통한 자기 해방의 에너지를 이들 세가지 층위에서 각기 소비, 재생산, 확장시켜 나가는 일련의 흐름일 것이다. 창조와 협력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은 인간 해방의 역사에서 반동이다.

자본을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개개인들의 협력적 대안적 생산 시스템의 창발이 첫째요,
민주주의 체현 없는 엘리트 관료들의 억압기구로서 국가가 아닌 구성원들의 통제 가능한 크기로 국가의 분할이 둘째요, 
구성원들의 개체로서 완전한 해방을 통한, 전달 불가한 지식과 지혜의 공인된 장터로서 학교와 종교의 소멸이 셋째다.

이들 세 층위에서 나름 벌어지고 있는 창발들의 변증법적 종합을 보는 것은 언감생심,
그저 인간 종이 방사능으로 또는 과도한 에너지 사용으로 인한 퇴행으로 멸종되기 전
각각의 창발들의 흐름이 시작되고 그 변증법적 '합'의 흐름의 시작이 너무 늦지만, 늦었다고 보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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