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의 신학

2014.04.14 18:51

나공 조회 수:658

내가 2002년 정도에 위키피디아에서 negative theology, 부정의 신학을 검색했을 때 아무 것도 없었다. 2005년 정도에는 간단한 설명... 엊그제 들어갔더니 부정의 신학이 뭔지 그리고 그와 같은 패턴, 형식이 다른 문화권의 종교들에서도 똑같이 어떻게 존재했는지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영어다. 한국어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다.

철학의 시작은 당근 지각의 인식에 대한 의구심, 즉 인식하고 있는 것에 대한 회의론적 태도로부터 시작된다. 서양 철학에서는 그래서 로크, 버클리, 흄으로 이어지는 경험론의 지각의 실체에 대한 회의론적 과정을 되밟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런 회의론이 훨씬 이전에, 기독교 신학에서도 존재했던 것을 아는 일반 사람들, 특히 한국에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신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중세의 정통 신학에서조차도 긍정의 신학에 대해 우월한 것으로 인정되고 긍정의 신학은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는 점은 특기할만한 하다.


9세기 신학자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신이 뭔지 모른다. 신도 자신이 그 어떤 것도 아니기에 자신이 뭔지 모른다. 말 그대로 신은 존재를 초월하기에 있지 않다.” 

부정의 신학자들의 신에 대한 접근 방식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 쓰는 방법론과 유사하다. 그들한테 '신'이란 단어 혹은 어떤 추상적 관념은 일종의 발견적 도구다. 그들은 신이란 인간 지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긴다. 신을 인간 지식의 어떤 단어들로 이리저리 정의 설명하는 것은, 부정의 신학과 상반되는 cataphatic theology. 긍정의 신학이라 불린다.

위키피디아에 있는 부정의 신학의 신에 대한 기술들은 다음과 같다.

존재하는 것이든 아닌 것이든 물리적 영역에서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신한테는 적용할 수 없다; 즉, 신성은 존재하는 또는 그렇지 않는 바를 넘는, 그리고 전체로 간주되는 개념화된 바를 넘는 어떤 ‘추상’이다; 해서,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신은 신성하게 단순하다 - 아니요! 신이 하나 또는 셋(三位) 또는 어떤 존재 유형이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신은 무지하지 않다 - 아니요! 신이 지혜롭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런 단어는 신성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라는 뜻이 있다고 거만하게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지혜로 알고 있는 것은 제한된 문화적 맥락에서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악마가 아니다 - 아니요! 개인적으로 그리고 전체로서 인간들한테 해당되는 선한 행동이라는 뜻의 단어 '선함'을 신을 기술하는 것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신은 창조주다 - 아니오! 신이 인간 전체와 관계하여 어떻게 존재하고 일하는지 우리는 정의할 수 없다. 전지전능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 유사하게, 신은 세상의 원인이다 - 아니오! 인과 관계라는 건 인간 이성이 구성한 기초 개념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신은 공간이나 위치 또는 시간과 같은 개념에 입각해서 정의하거나 제한될 수 없다. 무소부재라느니... .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다시말해, 인간 지식으로는 접근 불가능한 무엇이다. 인간 지식으로 형용하는 것 자체가 바로 신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정을 통해 각각의 개체가 다다른 혹은 발견한 신에 대한 관념은 어떤 것들일까? 이런 관념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합리적이기보다는 신비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접근이 이와 같다면, 그들이 다다른 특징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구성론 공준의 마지막 귀결, 우리의 모든 것들을 있게 한이 아니라 아직 우리의 모든 것과 부딪히지 않은 알 수 없는 무엇, 즉 '경외'할 무엇과 같으리라.

한편, 불교에서, 고타마의 십사무기라 번역된 '14개의 답변될 수 없는 질문'에서, 또한, 서구 기독교 문화에서 '신'으로 설정된, 인식 불가능한, 우리 인간 지식과 비교될 수 없는 '경험 밖 실재'에 대한 질문에 대한 고타마의 이상의 접근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인간 지식의 최고 형태라 하더라도 그 경험 밖 실재를 고려하는 순간 그것은 '공'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공'이리다. 이러한 태도에서 허무주의를 엿본다면 인간 지식의 창조성, 생산성을 보지 못한 것이다.

모든 문화에서 이러한 접근 방식은 각각의 문화에서 통용되는 신에 대한 긍정의 정의들의 역할들, 즉, 진리로, 권위로, 권력으로, 억압으로, 세뇌로, 우민화로 기능하는, 기능할 수 있는 바들을 제한하고, 역으로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한 합리성을 강조하며, 사람들의 신에 대한, 즉 알 수 없는 개체로서 타자들에 대한 경외를 북돋으려는 시도들이었으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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