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 또는 현실의 재구성을 위한 가이드 


나의 현실, 우리의 현실은 무엇인가 하고 물을 때, ‘현실’이란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가? ‘이것은 참, 정말, 진짜다’와 ‘이것은 사실이다’는 우리 일상어에서 통상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현실은 ‘일단의 정말 그렇고 진짜라는 것들’을 가리키거나 ‘사실들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일까? 벌어진 일들 가운데 사실인 것과 사실이 아닌 것들이 있을 것 아닌가? 우리 일상어에서 ‘현실’은 이 모든 것들을 포괄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일단의 진짜들, ‘사실들의 총체’는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 이를 ‘실재’라 부르는 것이 구별에 적합하다는 생각하지 않는가? ‘사실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 

하지만, ‘현실’이 사용되는 또 다른 맥락도 생각될 수 있다. ‘사실들의 총체’가 있고, 내가 우리가 지금 당장 ‘당면한 다루어야 할 문제 혹은 소재, 나 또는 우리의 깜냥, 그리고 제약으로서 환경’도 있지 않겠는가? 전자를 실재라 부르고 후자를 현실이라 부르는가? 실재와 현실을 이와 같이 구별할 경우, 전자는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반면 후자는 현재라는 시간에 제한된다. 이때, 실재는 경험 밖 실재를 지칭하는 ‘존재론적 실재’인가, 아니면, 경험 주체가 경험을 통해 구성한 ‘경험적 실재’인가? 

우리는 특정 문제를 맞닥뜨려 나, 우리를 중심으로 그 시점에서 특정 현실을 재구성한다. 이때, 현재라는 시점을 갖는 현실에서, 과거란 현재로 재구성된 기억이요, 미래는 달성코자 하는 현재 기대에 입각한 상상에 다름 아니다. 이 경우, 여기서 배제된 사실들은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어디가 아니라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어떤 이들이 실재와 현실을 구별 없이 바꿔 쓰는가? 둘을 구별 없이 바꿔 쓰는 경우, 말인즉, 실재와 현실을 동일시할 때, 지금 당장 내가 당면한 사실들, 즉 현실을 제외한 사실들은 없다는 말인가?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인가? 이것이 아니라면, 실재가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그저 현현(顯顯)한 것을 현실이라 부르단 말인가? 전자가 ‘생각하는 나’만 홀로 존재한다고 여기는 것이라면, 후자는 외부의 주어진 법칙이 그저 현재 여건에 맞추어 조정, 관철되는 것일 뿐이라고 여기는 생각이리라. 

정말 그렇고 진짜인 것은, 또한, ‘진리’라는 것으로도 불릴 수 있다. 진리, 사실들이란 객관적으로 입증 또는 확인된 것들인가? ‘객관적’이란 ‘과학적으로 입증된’, 또는 ‘특정 사회 집단에서 다수가 인정하는’이란 의미로 쓰이는 것인가? 더 나아가, ‘객관성’을 부여받은 진리, 사실들은 개개인들의 경험과 무관하게, 혹은 관찰자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일 수 있는가? 한편, ‘과학적’이란 ‘특정 패러다임을 공유하는 과학자 집단의 실험, 절차적 합의 과정을 거쳤다는’ 뜻인가? 아니면, ‘관찰자 또는 경험 주체가 경험과 실험을 통해 해당 이론, 또는 도구의 작동 여부를 통해 유효성을 확인하는’이란 뜻인가? 또한, 확립된 체제로서 사회적 권위를 확보한 전자가 어떤 권위도 확보하지 못한 개개인들의 경험적, 즉 ‘사적 과학’ 문화를 북돋기 위해서는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모든 데이터에는 이론이 실려 있다

내가,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란, 일상이든 이론적 영역에서든 사소하든 크든, 해결할 문제를 놓고 벌어진 나, 우리가 마주한 것들이다. 이때 마주한 것들은 나, 우리를 중심에 놓고 작동하는 정도, 문제에 미치는 영향력의 정도, 나, 우리가 믿고 선호하는 정도, 문제 해결 방식과 과정에 따라 가변적, 역동적으로 시공간을 차지하며 나,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마주한 것들 가운데 사실들은 나, 우리가 생각하고 믿고 행위하는 방식에 따라 달리 보이고 달라지는 것으로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말인즉, 사실들은 그것들이 형성되는 방식과 관점에 따라 상대성을 갖는다: “모든 데이터에 이론에 개입되어 있듯이, 모든 사실들에도 마찬가지로 관점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일상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그 어떤 것도 “이상의 진술”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그럼에도, 자주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 생각, 행위가 그로부터 자유롭다는 듯이 처신하고 편안해 한다. 그것은 관습적, 인습적으로 정당화된 확립된 방식들이기에 거기에 회의를 품는 것은 괴짜들이나 호사가들의 딴지-걸기나 역사적으로 성스런 자들로 방부-처리된 이들의 기행이나 교훈 정도로 처리된다. 당신의 말하기, 생각하기, 행위하기 아래 숨어 있는 전제, 관점이 들추어질 때, 더구나, 그 결과, 그 하기들이 상충되고, 전제들이 부실하거나 충돌하고 있으며, 관점의 편협으로 인해 ‘선함’의 기계적 반복으로 폭력 문화에 기여하고 있음이 들추어질 때 아프지 않을 이가 없을 것이다; 특히, 자기 반성이 아닌 타자에 의해, 들추어지게 될 때는 단순한 아픔을 너머 온갖 감정들을 수반하며 사회적 부작용까지도 야기하게 된다. 

모든 이론은 그럴듯한, 인정될만한 가정, 전제를 깔고 시작된다. 그리고 이론들은 경험, 실험을 통해 그 이론의 가정들을 재검토한다. 실상, 가정들은 정말 그런지 어쩐지 자체로는 알 길이 없는데, 해당 이론의 전제로 쓰이고 그 이론이 잘 작동한다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그 가정들은 정말 그렇구나 혹은 그렇게 존재하는구나 하는 지위를 확보한다. 이런 경우, 가정은 나름 발견적 도구로 기능했다고 말해진다. 이렇듯, 과학적 이론들은 자기-준거적 성격을 갖고 있다; 지식 이론 또한 이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지각된 것으로서 사실 

지각장에서 현상을 마주하고 지각하기를 행하는 이도, 이상의 과학적 이론의 자기-준거적 과정을 행하고 있다. 경험의 흐름에서 지각하기가 작동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현상을 마주하는 일이다. 하지만, 통상, 우리는 이 현상을 거의 마주하지 못한다. 지각장에서 나타나는 무작위적 혼돈 상태에서 注意(at~tention)로 일부를 잘라내는 일, 즉, 구별 작용은 거의 자동적으로 처리되어 그 구별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지각 패턴들, 시공간, 사물, 인물, 등등에 즉각적으로 동화되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를 재차 이 구별 작용과 그 결과, 즉 현상에 집중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지닌 패턴들에 현상의 일부를 동화, 조정으로 처리하여, 이를테면, ‘이건 사과야’라고 인지한다. '이것'은 지각장에서 구별된 것을 지칭하고 '사과'는 내가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관념인 것이다. 이것이 지각하기라는 사건의 결과, 말 그대로, 벌어져 맺힌 것, 사실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과-패턴은 지각하기 주체가 이미 앞서 각고의 과정을 거쳐 구성해 얻은 것이다. 다양한 형태적 차이와 색깔, 그리고 물성에 대한 확인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경험과 '단어-표상 연결 다듬기'와 같은 타인들과 상호조정 과정을 거친 이후에 확립된 것이다. 

실재란,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것을 ‘사실’로 여기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내 물리적 신체 밖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에 입각해 내가 나의 몸을 통해 지각하듯이 너도 너의 몸을 통해 그것들을 지각한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어, 나의 관념들로서 지각 패턴들은 내 몸 밖에 각자 자신의 할당받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거기에 실재하는 것들, 즉, 사실들이 된다. 이것이 통용되어 상식이 된 일상에서 이를 부정하면 미친 놈 취급을 받을 것이다. 구성론에서, '몸'이란 지각장과 感覺發動場(sensorimotor field)을 경험을 통해 세분화 구성된 물리적 실재다. 반면, 실재, 사실들의 총체가 자신의 물리적 몸 밖 혹은 자신의 경험 너머에 있다고 여기는 걸 우리는 소박 실재론, 혹은 소박 유물론이라 부를 수 있다. 지각하는 이한테 지각장, 현상 너머는 결단코 그 무엇으로도 다다를 수 없는 (하지만 없지는 않는) 영역이지만, 소박 실재론은 '지각장 너머, 현상 너머'를 물리적 실체로서 몸 밖과 동일시 하며. 상식에 기대 무지를 정당화시킨다. 



지각된 사실의 한계 

철학의 시작은 이러한 일상화된 소박 실재론적 상식을 전제로 출발했다; 달리 말해, 개체의 중추 신경에서 조직되는 관념은 개체 밖 실재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로크는 개체 밖 실재 혹은 관념의 대상으로서 ‘실체’의 속성들 가운데 크기, 움직임, 수, 연장(extention)과 같은 1차적이라 칭한 공간 점유 속성만을 인정했던 반면에, 버클리는 이마저도 부정했고, 흄은 관념의 구성에는 구별된 것들의 선후 관계만이 요구될 뿐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러한 實體(substance) 자체를 아예 제거해버렸다. 이제까지 철학의 시작점, 전제가 부정되고 새로운 출발점이 필요해진 것이다. 칸트가 말한 철학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점에 해당된다. 관찰자 관점에서, 개체 밖 환경에 대한 개체의 인식 불가능성이요, 인지 주체의 관점에서는, 경험 너머 실재, 지각장 밖 세상에 대한 인지 주체의 접근 불가능성을 확립한 것이다. 그럼에도, 경험 밖 실재에 대한 이론적 구성의 접근 가능성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들은, 물리학에서 궁극적 입자를 찾는 것이 우주의 근원을 밝힐 수 있다는 바람처럼, 여전히 지각장에서 현상 또는 그 현상의 기저를 파고들수록 그 가능성에 다가갈 수 있다는 가망 없는 작업에 매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세계는 감각기관을 거친 지각을 통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가 구성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며, '이 구성의 시작, 전제는 어떻게 설정되며 그 구성 전개는 어떤 방식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해한 이들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흄이 제시한 시작점에 이어 칸트가 그 하나의 예를 보여주었고, 이후 관념론과 유물론의 사상적 계보에서 이러한 구성론적 지식 이론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났는지는 각 계보를 궁구한 이들한테 반성을 요하는 일이다. 

실상, 지각하기는 일련의 경험의 흐름에서 합리적 영역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합리적 영역이란 지각하기, 비교하기, 행하기로 조성되는 구조, 스킴, 시스템을 가리키며, 이러한 시스템은 지각장과 감각발동장에서 지각하기와 행하기라는 일련의 자기-순환적 과정으로 작동한다; 이것이 경험이다. 경험은 이성이 지각장에서 최초로 작용을 시작하는, 즉, 현상이라 칭해지는 구별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때, 이성이란, 삐아제를 빚대자면, 최초 스킴(scheme)의 작용이다. 이 스킴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고자, 관찰자가 보기에, 감각발동장에서 반복적 행하기로 지각장에 얻고자 하는 현상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적절한 행하기에 이어 그와 관련 있다고 여겨질 현상이 창출되고 그것을 행하기 의도에 적합한 것으로 인지하는 과정에서, 한 과정이라도 문제가 있을 경우,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를테면, 스킴을 수정하거나 동일 목적을 지닌 다른 스킴으로 대체하지 못한다면, 그 개체는 생존에 치명적 장애를 맞이할 것이다. 

작동하는 스킴, 성공적 스킴, 즉, 바이어블(viable)한 스킴은, 이제, 지각된 것으로서 사실을 너머 ‘사실’이라는 정의에 보다 분명한 상을 제공한다. 알기라는 것은 지각하기를 너머 특정 작동하고 있는 스킴에 대한 알아차리기로 확장되는 것이다; 지각된 사실, 지식에서 체계로서 사실, 지식으로 발달한다. 지각하기에서 지각하기 주체가 하는 일은 지각장에서 마주한 현상들을 마주한 대로 혹은 수정해서 적합한 지각 패턴에 맞추는 것이다; 이를 삐아제의 스킴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일종의 시스템임은 분명하다. 지각하기에서, 특정 현상이 특정 패턴에 동화나 조정이 불가능할 경우, 아울러, 그 현상이 이후 반복해서 지각장에서 나타날 때, 즉 주의(注意)로 그 현상을 잘라낼 수 있을 때, 새로운 지각 패턴은 창조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통상 감각발동, 즉, 행위가 수반되지 않기에 지각하기는 수동적 과정이라는 잘못된 상식이 유포되어 있다. 하지만, 스킴 알기에 이르면, 지식이란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인지 주체가 구성하는 것이며, 알기란 적응하기이며 경험 세계 조직하기이지, 존재론적 실재 발견하기가 아니라는 점에 이르게 된다. 


작동하는 체계로서 사실 

스킴과 하나가 되어 작동하는 주체(at~man)는 스킴 그 자체를 아직 전체로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다. 스킴 알기에 이르러, 특정 스킴은 지식이라는 지위를 얻고 이후 다른 스킴의 작동 과정, 즉, 지각하기, 비교하기, 목표조정하기, 행위하기 영역에서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지식 또는 도구로서 지위를 얻은 것은 어디엔가 놓여져야 한다. 당장 쓰이고 있지 않는 한, 그것은 현실이라는 시공간 이외 공간을 필요로 한다. 작동하는 체계, 지식, 도구들이 머무는 공간을 우리는 경험적 실재라 부를 수 있다; 경험적 실재에는, 지각장과 감각발동장을 세분화 구성한 물리적 실재로서 몸도, 물론, 포함된다. 

실상, 스킴들이 발달 전개되는 특정 시점,즉, 타자들과 그 관계들로 조성되는 사회가 착상되는 시점부터, 사실들은 사회라는 영역에서 타자의 승인과 관계되어 또 다른 지위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이 지위를 가리켜 ‘상호주관적’이라 부르고 그 공간을 상호주관적 실재라 부를 수 있다. 이 공간을 대신해 실재론(realism)에서는 같은 지위를 갖는 영역을 ‘객관적 실재’ 또는 ‘절대적 실재’ 혹은 ‘존재론적 실재’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체계로서 사실, 지식은 체계 알기의 결과다. 체계 알기란 현실을 일정하게 조직된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며, 그 알기의 결과는 체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반성을 수반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회적 체계로서 자본 알기는 체계 속 자신의 역할에 대한 알기와 현 체계에 대한 반성에 이은 다른 체계에 대한 구상을 자극한다. 알뛰세의 맑스에 대한 지식 이론에 대한 이해는 체계 알기와 그 결과로서 지식에 대한 좋은 설명적 예다. 위키피디아에 정리된 알뛰세의 맑스이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설명의 한 대목이다: 

맑스 작업이 그의 앞선 작업들과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까닭은, 알뛰세의 생각으로, 그의 작업이 주체와 객체 사이 구별을 거부하는 획기적인 인식론(지식 이론)에 기초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알뛰세 주장으로, 맑스의 철학, 변증법적 유물론은, 경험론과 대척점에 서서, ‘비젼’으로서 지식 이론을 생산으로서 지식 이론으로 반박했다: <말인즉, ‘심적 이미지를 알아보는’ 지식 이론의 제한성 또는 관념성을 뛰어넘고자 그는 지식 이론을 행위로써 소재, 물질에 변형을 가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일종의 생산 과정으로 보았다>[17]. 경험론의 관점에서, 알기 주체는 실재하는 대상을 마주하고 추상을 통해 그 핵심을 들춰낸다.[18] 경험론자(혹은, 실재론자)는, 사유(思惟)를 통해 실재에 직접 개입할 수 있다거나 ‘실재’ 대상에 대해 바로 볼 수 있다는 가정에 바탕을 두고, 지식의 진리(眞理)란 주체의 사유가 그 사유 외부에 있는 대상과 일치 혹은 대응하는 ‘가운데’ 있다고 믿는다.[19] 이와 달리, 알뛰세는 맑스 작업에서는 지식을 “이론적 실천”으로 보는 관점이 잠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알뛰세한테, 이론적 실천은 전적으로 사유의 영역 안에서 이론적 대상들에 가해지는 그리고 이로써 알고자 하는 실재 대상과는 결코 직접 접할 수 없는 상태에서 행해진다.[20] 지식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일반화 방식들을 통해 생산된다: (1) 과학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관념, 추상, 그리고 사실들과 같은 “원료(raw-material)”; (2) 이것들과 관련되어 끌어온 개념적 (혹은 문제시된) 틀; 그리고 (3) 변형된 이론, 구체적 지식으로 마무리된 산출물.[21] 이러한 관점에서, 지식의 타당성(즉, 존립의 정당성)은 자신의 외부 어떤 것과 일치 혹은 대응에 있지 않다; 맑스의 사적 유물론은, 과학이기에, 그 자신의 내적 증명 방법들을 갖고 있다.[22] 따라서, 지식은 사회계급이데올로기또는 정치와 같은 것들의 이해로 좌지우지되지 않으며, (경제적) 상부구조와도 다른 것이다.


이상의 설명에서, 용어들의 차이는 있지만, 알뛰세가 맑스를 소박 실재론에 해당하는 속류 유물론이나 변증법적 유물론의 퇴화된 소비에트식 과학적 유물론으로 이해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재, 현실의 재구성을 위한 전제 

살펴본 바와 같이모든 알기는 전적으로 개체의 경험에 기반한 주체의 능동적 창조적 실천이다실천은말 그대로단순한 행위가 아닌 일정한 목적을 수반하는즉 소재 또는 물질에 변형을 가함으로써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일정한 체계의 작동이다따라서그 알기의 결과인 지식도 마찬가지로그 근본에서전적으로 개인적인 것들이다.

 

하지만우리가 사회를 착상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 지식은 사회라는 영역에서 그 타당성타인한테도 작동가능한가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물리적 분과들과 관련된 지식 또한 개인적 수준에서 그 타당성이 확인되었다 하더라도 그 분과들의 승인을 통해서만 사회적으로 유통될 수 있다더 나아가사회 영역에서 작동하는 체계들은 타자들그리고 그 관계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확립된 것들이기에 그 체계 알기는 필히 그 체계 작동에서 역할 수행을 수반하며그 역할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다른 영역의 지식 산출과 다른 점이다따라서,사회적 지식의 생산즉 사회적 체계 알기는 필히 사회적 협력을 요구한다.

 

지식은 전달될 수 없는 것이란 인식에 도달한 이들은그럼에도협력의 필수 전제인 상호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가실증주의와 행동주의 심리학이 포기한 타자의 마음 이해를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구성론자들이 채택한 방식은 마음에 대한 가설을 설정하고 그 블랙박스가 산출하는 행동을 통해 가설을 확인하는 과학적 방법이다이어동일 관심사와 관련해 나름 확인된 가설로서 타자에 대한의 이해하기와 그 관심사에 대한 나의 이해의 양립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으로서, 이해하기의 이해하기란 협력의 기초를 다진다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조성하는 핵심 기초다.

 

당면 현실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첫 번째 작업은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깜냥들그리고 그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사실과 작동 체계들그리고 깜냥들과 그 체계들의 작동을 제한하는 여건들으로 당면 현실을 구성하는 것이다현실 구성이 가능하지 않거나 실패했다면그것은 문제 설정 또는 목표나 기대 설정이 잘못되었거나 과한 것이다그럼에도그러한 현실 구성을 유지하고자 할 때주어진 소재물질적 조건을 무시하고 특정 이해나 목표(관념지향을 지속할 때필히타자를 강제하는 권력 지향성을 강화시키며또는 이와 관련되어 뻔히 보이는 제약에 반복적으로 충돌하는 성향을 유지시킨다.

 

개인이든 상호이해와 협력으로 조성된 집단이든당장 쓸 수 있는 것들로 목표를 노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우리가 무인도에 홀로 생존해야 할 때 그러하듯 그러해야 한다상상만의공상적 관념들체계나 전체로서 이해되지 않는 파편적 지식들실제 삶에서 그리 유용하지 않는 부유하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노이즈들로 우리의 경험적 실재를 채우는 일부터 당장 그만두고자신의 생존과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작동하는 사실들로 그 공간을 채워가야 한다지금 당신이 기대하고 있는 미래의 어느 순간그 현실에서 필요한 깜냥과 지식들은 당신의 경험적 실재가 어찌 조성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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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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