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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6 13:48

1-2. 역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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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여전히 당신에 대해 생각하 것이다.

                                     그때, 당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겠다는 것을

                나는 생각하지 않고자 한다.

                                             

                                                            (Zen) 경구

 

 

               
번역은 결코 혼동의 근원(根源)이 될 수 없다.

혼동은 때때로 메시지 자체의 구조에 고유한 것이기도 하다.

재차, 이것은 사례들로 가장 잘 소개된다.


   1. 철학자든 신학자든 한결같이 괴롭혀 온 아주 먼 옛날 이야기가 있다:

       악마는 일찌기 창조주(God)의 전능(全能)을 의심한 나머지,

       창조주한테 그조차도 들 수 없는 엄청 큰 바위를 만들라 했다.

       창조주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바위를 들 수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전능하지 않으며;

       든다면, 바위를 그 이상 크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2. 여덟살 정도 아이한테,

       'What do you think that Mona lisa smiled about?' 라고

       물었을 때 나올 수 있는 대답:

       “리자씨가 일을 마친 저녘 집에 와서 모나 리자한테 물었어요.

       ‘여보, 오늘 어땠어요?’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어요.

       ‘상상해봐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와서 내 초상화를 그렸어요.’”


   3. 다음과 같이 쓰여진 인기 있는 범퍼 스티커가 있다:

      “My convictions are not for public display(나는 불법 게시물을 부착하고 있지 않다).”


   4. “내가 꽃양배추를 좋아하지 않아  기쁘다;

         내가 좋아했다면 그것을 먹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싫어한다.” (작자 미상) 


   5. 철학자 칼 포퍼는 동료한테 다음 편지를 보내며, 농담조로, 요구했다:

 

         친애하는 M.G.,


         미안하지만 이 카드를 나한테 반송시켜 주게. 반송시킬 때,

         내 서명 왼쪽 직사각형 빈칸에 “Yes” 또는 다른 원하는 표시를 써넣게나.

         단, 반송시 내가 여전히 빈 상태로 받아보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경우에만.


                                                                                                     당신의 진정한 친구,   

                        

                                                                                                      K. R. Popper  [134]                                                           
                                                             

 

이제까지 멍한 느낌에 마음이 답답해진 경우라면, 이미 이러한 혼동 형식을 직접 경험한 적이 있다.

파멜라 L. 트래버스가 쓴 메어리 포핀스에서 뽑은 또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자.

영국인 유모, 메어리 포핀스는 그녀가 떠맡은 쌍둥이, 제인과 마이클을 데리고,

몸집이 큰 패니와 애니라는 슬퍼 보이는 두 딸을 둔 작고 마귀 할멈같은

코리부인의 생강빵 가게에 갔다. 대화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이보게, 내 생각에” – 그녀는 메어리 포핀스한테 돌아서며 말했다.

   포핀스를 오래 전부터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

   “자네 생강빵 사러 오지 않았나?”
   “맞아요, 코리 할머니,” 메어리 포핀스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렇군, 패니애니가 너희한테 내주었니?” 할멈은 제인과 마이클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주지 않았어요, 어머니” 패니가 유순하게 대답했다.
   “막 내주려던 참이었어요, ....” 애니가 겁에 질려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때 코리할멈은 허리를 곧추 세우고 거인 같은 자신의 딸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부드럽지만 사납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막 주려던 참이라? 오, 정말! 그것 참 재밋군.

    헌데, 애니, 물어보자, 누가 너한테 내 생강빵을 내주라 그러던~?”
   “그런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전 내주지는 않았어요. 단지 생각만 했을 뿐... ”
   “단지 생각만 했다고! 친절도 하셔라. 허나 그것까지 않했으면 고마웠을 텐데.

     이곳에서 필요한 그 모든 생각하기는 바로  일이란다!” 할멈은 부드러운 그렇지만 무섭게 말했다.

     그리고는 거칠은 긁는 듯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얘 보게! 얘 좀 보게나! 이런 겁쟁이! 울보!”

     할멈은 옹이 많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딸을 가리키며 새된 소리로 웃어댔다. 
     

     제인과 마이클이 몸을 돌렸을 때, 그들은 애니의 커다란, 슬픈 얼굴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작은 몸집의 코리 할멈한테 오히려 위축되고 두려움을 느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172]

 

잠깐 사이에,

코리 할멈은 불쌍한 애니의 세 가지 인간 기능,

행하기, 생각하기, 그리고 느끼기, 모두를 차단할 수 있었다.

할멈은 우선 아이들한테 빵을 내주는 일은 바른 일임을 암시한다.

딸들이 아직 하지 않은 일에 바로 사과하고 있는 그 순간,

할멈은 돌연 그러한 행위를 취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애니는 실제로는 그 일을 아직 하지 않고, 다만 생각만 했다면서 방어하려 한다.

코리 할멈은 즉시 그녀가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를 그녀에게 주지시킨다.

그 엄마가 자신의 불쾌함을 표현함으로써, 분명 흘렸던 것은, 

이는 중요한 사안이라는 점, 그리고 그 딸한테

발생한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점이다.

이로써 그 할멈은 애니가 눈물을 흘리도록 몰아부쳤고

곧바로 즉시 애니의 감정을 비웃고 있다.        

 
이를 소설이라고, 게다가 아이들 소설이라고, 지나치는 실수는 하지 말자.

정신의학적으로 신경증이라 진단받은 이의 가족들의 소통 양식, 또는

더 큰 집단의 인간 갈등에 대한 연구[13, 80, 82, 166, 167, 168, 174, 185]에서는

이러한 패턴이 매우 자주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중구속(double bind)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중구속과 앞서의 사례들의 공통점은, 그것들이 모두

형식논리의 역설 또는 이율배반과 같은 구조로 짜여져 있다는 점이다.

우리들 대다수한테 정식화된 역설들은 그저 학창 시절의 즐거운 추억 거리일 뿐이지만,

소통에 담긴 역설들은 정말 실질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메어리 포핀스의 이야기에서도 그렇지만, 역설적 주제의 세 가지 기본 변형태가 있다: 


   1. 개체가 외부세계나 자신에 대한 정확한 지각에 대해

나름 중요한 타자(이를테면, 아이가 부모)한테 벌을 받을 경우,

그 개체는 자신의 감관 자료들을 불신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곤경에 빠져드는 경우는, 이를테면,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가 아이들한테 자신을 온화하고 사랑스런 부모로 보도록 요구할 때,

특히, 그가 술에 취한 채 집에 와서 아이들을 폭력을 쓰면서까지 위협할 때이다.

그때, 그 아이들은 현실을, 그들한테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그들 아버지가 그들한테 정의해주는 대로 지각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러한 종류의 혼동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은, 살면서 부딪히는 수많은 상황들에서,

적절히 행동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우연히라도 알게 되고, 그런 연후,

현실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깨닫는 데에 과도한 시간을 소모할 수도 있다.

그의 행동이 해당 대인관계 상황/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진찰되는 경우,

그 행동은 정신분열증의 진단 기준들을 만족시킬 것이다.  


   2. 개체 자신이 실제 경험하고 있는 것과는 딴판인 감정들을

그가 갖고 있으리란 기대를 나름 중요한 인물한테 받고 있는 경우,

결국, 그는 타인한테 인정받기 위해 그가 느껴야만 하는 그에게 말해진 것을

느낄 수 없다는 바에서 오는 죄의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가 갖지 말아야 할 감정들 가운데 하나에 죄의식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이러한 종류의 딜레마는, 부모가,

실패를 암묵적으로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아이의 우발적이지만 자연스런 슬픔(또는 실망 또는 피곤)을 야기시킬 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한다.

 그에 대한 부모의 전형적 대처는,

 “널 위해 우리 할 바는 다했으니 넌 행복해야 돼”와 같은 메시지다.

 슬픔은 이제 못되먹은, 배은망덕한 감정으로 이어진다.

불행을 느끼지 않으려는 헛된 시도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아이는

상황/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진단되는, 우울증의 진단 기준들을 만족시키는 행동을 보인다.

우울증이 생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개체가 제어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책임을 느낄 때, 또는 책임질 때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사안들이란, 이를테면, 

부모의 부부갈등, 부모나 형제자매의 병이나 파산, 또는

자신의 물리적, 정서적 자산을 초과하는 부모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  


   3. 나름 중요한 타자가 특정 행위를 요구하며 또한 금지하는 명령을 하는 경우,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데,

그 경우 개체는 (특히 아이는) 오직 불복하기로만 복종할 수 있다.

이러한 바의 전형:

“너가 그랬으면 하고 내가 바라는 것 말고 내가 말한 것을 해라”.

이는 십대 아들한테 

아들이 저돌적이면서 동시에 법을 준수하기를 바라는

엄마가 던지는 메시지다.

그후 벌어질 수 있는 결과는

비행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만족시키는,

상황/맥락에서 벗어난 것으로 진단된 행동이다.

또 다른 사례들로,

공정하게든, 반칙을 쓰든 이기는 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만,

아이한테는 “항상 정직해야 된다”고 말하는 부모;  또는

아주 어린 딸에게 섹스의 위험들과 추함을 경고면서, 그렇지만

그 딸이 소년들한테 "인기"가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엄마 [180].   


이 주제의 네 번째 변형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 상호작용에서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 변형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요구할 때마다 발생한다:

그 자체로는 자발적일 수밖에 없는, 그렇지만 요구되었기에, 이제는 자발적이지 않은 행동.

무엇이든 스스로, 자진해서, 또는 자발적으로 하라는 명령문, “알아서 해(be spontaneous)” 역설은,

필요한 그 무엇의 중요성에 따라, 가벼운 성가심에서 치명적 함정에 이르기까지, 강도를 달리한다.

이러한 종류의 자멸적 역설의 창조 없이,

타자가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이행하게끔 할 수 있는 방식은 없다는 점은

인간 소통의 결함들 가운데 하나다.

남편의 애정 표현이 필요한 아내는 결국은 남편한테 말한다;

“가끔은 꽃을 선물받고 싶어요”.

그 요청은 쉽게 이해될 수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기회를 돌이킬 수 없게끔 망쳐버렸다:

남편이 그 요청을 무시할 경우 그녀는 불만스러울 것이며;

당장 꽃을 받는다 해도, 남편의 자발적 행동이 아니기에, 역시 불만스러울 것이다.   

 

아주 꽉막힌 똑같은 상황이,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부모가 아이의 자기 주장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할 때, 발생한다.

부모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방식으로, 신호를 보낸다:

“넌 너무 얌전해서 탈이야!” 또는 "남 말만 듣지는 말아라".

이것 역시 양자택일의 결말들을 남기며, 둘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주장없는 아이로 남든지 (부모 말을 듣지 않아 부모들은 불만), 또는

고집불통으로 되든지 (부모 말을 잘듣는다는 핑계로 부모 말마저 듣지 않기에, 불만).

이러한 상황에 처한 사람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결말들 어느 쪽도 역설 발생을 자초한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알아서 해” 주제의 한 변형, 혹은 그 주제의 역(逆)으로,

호텔 지배인들이 중시하는 “세련된 감동(nice touch)”을 이후 살필 것이다.

여종업원의 얼굴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즉, 모순된] 옷깃 배지의 환영 표현 뿐만 아니라,

“찾아주셔서 기쁩니다” 라는 말 자체도 소통되는 방식과는 더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환영은 개인적이며 자발적일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유니폼의 일부로서 모든 호텔 종업원들한테 걸쳐진 메시지 문구같은 경우,

그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손님한테 그/그녀가 기대할 수 있는 일종의

“개인별” 서비스라는 멋진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여기서 역설은 자발적 행동을 요구하는 데에 있지 않고,

그러한 행동이 무차별적이고 일률적으로 제공(상품이) 된다는데에 있다.)

 

depressed waitress.JPG




 “알아서 해” 패턴은 도처에 존재하는, 즉 보편적 역설이다.

논리학에서, 또한 순수수학 특히 컴퓨터과학에서, 최근의 진전들은, 

외관상 모호하지 않는 많은 개념들(이를테면, 계산가능성, 증명가능성, 일관성, 개연성)이

궁극적으로는 역설을 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자발성, 신뢰, 제정신 또는 권력에 이르기까지,

더 일반적 개념들에 대해서도 참이다.  

 

권력은 정말이지 그 자신의 역설과 이중구속들을 창조할 수 있으며,

그것은 60년대 중반 미국과 일본 사이 관계에 대한 연구인

“일본인 햄릿”이라 불린 논문에서 그려지고 있다.

저자 피터 쉬미트는 국제 관계 분석으로 유명한 독일 저널리스트로서, 일본을

안전과 미덕이라는 상호배타적 관념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햄릿처럼 보았다:

 

   권력은, 논증을 진척시키면, 악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과, 완전히는 아니지만 가능한 한, 인연을 끊고 지낸다.

   나를 보호해주는 친구가 있다. 그는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다.

    … 그러므로 악이다. ... 그를 경멸하고, 증오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다. 선하고 싶기에 나한텐 권력이 없다

   … 그러므로 나의 악한 친구는 나에 대한 권력을 갖고 있다.

   나는 그가, 그 강한 권력으로, 그리하는 것을 비난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가 휘청거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덜덜떤다. 왜냐하면,

   나의 보호자가, 악은 그럴 수밖에 없듯, 휘청거릴 경우,

   그때, 나, 선 또한 휘청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159]       

 

권력이란, 액튼 경이 말했듯이, 부패하는 경향이 있고,

그리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권력의 사악한 효과들은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권력의 실존를 부정할 때 생겨나는 역설적 귀결들은 알아보기 훨씬 힘들다.

권력과 압제로부터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관념은, 낡은 유토피아적 꿈으로,

주기적으로 재생, 부흥, 유행되는 것으로 지금도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이상주의자들은,

'사회로 인해 부패하지만 근본에서는 선한 자연인'이라는

루소의 개념을 재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명제로는, 오늘날도 루소 시대와 마찬가지로,

다음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들한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찌해서 자연인 전체가 불행하게도

억압, 정신병, 자살, 이혼, 알코올중독, 그리고 범죄에 책임있는

음흉하고 사악한 권력으로 변하는가?'

그들, 이상주의자들은,

인류는, 필히 폭력을 쓰지 않고도, 전면적 자유의 지복(止福)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고 되돌아 가야만 한다는 주장을 계속한다.

그러나 칼 포퍼가 그의 유명한 1945년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경고한 바대로,

행복한 원시 사회라는 (말이 나왔으니, 결코 실존하지 않았던) 낙원은

지식의 나무의 과실을 맛보았던 이들한테는 영원히 닫혀 있다:

“우리가 영웅적 부족주의 시대로 되돌아가려 하면 할수록, 

고문, 비밀 경찰이 판치는, 낭만이 깃든  조직적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보다 확실하게 다다를 것이다.” [135]


이러한 역설을 더 실제적 틀에서 다룰 목적으로, 현대의 정신병원에서는,

의사, 직원, 그리고 환자들 사이 권력 관계가 보이지 않도록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치료의 목적은 환자를 정상(normalcy)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그 상태에 환자 스스로는 이를 수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병원에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정상을 의학적, 심리학적, 또는 철학적 용어 그 어떤 것으로 정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로는 아주 명확한 행동 기준들(norms)을 가리킨다; 환자한테 그것들은

자발적으로 그리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님에도

따라야만 하는 것들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환자가 적절히 행동하기 위해 도움을 받아야 하는 한, 그는 환자다.

비(非)강압성, 자발성, 그리고 평등/대등에 대해 척하는 바가

드러나기까지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예를 들면,

최근 정신병원의 병동 야외식사에서, 한 환자가 고기를 굽고 있었다.

의사가 다가와 그와 대화를 시작했고 그 사이 바로 눈앞에서 고기는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 사건이 이후 토론에 부쳐졌을 때 판명된 바, 그 환자는, 그들이 대등하다면, 

의사가 타고 있는 고기를 어떻게든 할 수 있으리라고, 당연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반면, 그 의사는

자신이 고기를 구울 생각이 없다는 바가 환자한테 전해졌으리라 보고 고기를 꺼내지 않아도 된다고 결정했다.      


우리 사회에 진정 비강압적 환경을 만들려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시도는, 이른바 내뿜기 센터(blow-out center)다:         

이는 헌신적 도우미들이 심각한 신경증 환자들을 돕는 조그만 입원치료 단위로서,

여기서는 그러리라 여겨지는 것들은 완벽히 허용되는 환경을 제공한다. 하지만,

당연한 바로, 이들 센터들조차도 권력 구조, 즉,

특정 행동들에 대한 엄격한 규칙들 없이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타인에 대한 폭력, 성행위, 약물 남용, 그리고 자살 시도와 같은 행동들.

이들 제약들은, 권력과 강압에서 이른바 완전히 자유롭게 된 상황/맥락에만 

부과되지 않는다면, 결코 나쁜 것들이 아니다.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비강압성은 유지시켜야 한다는 주장은,

명백한 것들을 부정하는 기묘한, 거의 분열적 상태를 초래하며, 이어

이들 센터를 치료사의 바람 이상으로 환자한테 더욱 내집같이 여기도록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꼭 덧붙여야 할 것으로, 입원자 가운데, 이를테면,

추운 겨울밤 모든 창문을 깨부수는 강한 내적 충동에 빠지는 습관을 가진 환자는

그 내집을 결국엔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며, 그리 될 경우,

그를 최초로 황폐화시켰다던 사회의 처분에 재차 맡겨질 것이다.* 

 

역설적 상황들이 창조한 혼동을 진단하는 것 이상으로,

그 상황들을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까닭은, 유감스럽지만,

그 해결에는 비상식과 부조리 혹은 외관상 부정직한 행위들까지

필요하다는 점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유명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


스페인 왕, 챨스 5세는 해가 지지 않던 제국을 통치했다. 이로 인해,

먼 해외 식민지에 있는 왕의 관리들한테는 괴상한 소통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마드리드에서 전달된 제국의 명령을 충직하게 수행할 것이라 여겨졌지만,

종종 그럴 수 없었던  까닭은,

그 훈령들이 지역 상황에 대해 지독히 무지한 가운데 내려졌다 점이 문제가 되었기에, 또는

내려진 지, 몇 달까진 아니어도, 수 주가 지나 도착될 쯤에는 대개 쓸모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중앙 아메리카에서 이러한 딜레마는 매우 실용적인 해결책에 이르렀다:

Se obedece pero no se cumple.(복종하되  따르지는 말라). 

이러한 처방 덕택에, 중앙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번영했는데, 그것은 

에스코리알에서 온 제국 명령의 이행 때문이 아닌 명령에도 '불구하고' 했기 때문이다.

두 세기가 지나, 이러한 방편은 마리아 테레사 여왕 통치 기간 중

마리아 테레사 훈장 제정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오스트리아 최고 무공훈장으로 남았다

(그리고 온갖 비판에도, 2차 세계대전까지 헝가리에서 또한 그랬다).

부조리를 새롭게 만들었던 것은,

자신의 권한으로 사안을 처리하며 능동적으로 명령에 불복종함으로써, 

전투의 흐름을 바꾸었던 장교들이었다.

물론, 일이 잘못되면 훈장은 커녕 불복종으로 군법정에 서야 했다.

마리아 테레사 훈장은 아마도 직무와 관련된 대항-역설로는 최고 사례일 것이며,

돌과 화살이 쏟아지는 난폭한 운명을 지닌 나라에 어울리는 태도는,

항상 다음 모토로 특징지워진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심각하진 않다'. 


구조는 비슷하지만 더는 합리적이지 않은 역설은 조셉 헬러의 소설 Catch-22 [66]에서 보인다.

2차 대전 당시 지중해의 미국 폭격기 중대의 조종사, 요사리언은,

나날의 비인간적 폭격 임무에 시달리며 자신이 미쳐가는 걸 느꼈다.

전투 중 죽는 것이 아닌 유일한 출구는 정신의학적 요건들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는 항공 군의관, 데네카 박사와 자신이 해당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고, 

완벽히 가능하단 걸 알았다. 그가 할 일의 전부란 단지 신청하는 일 뿐이었다.

군대논리에 베테랑이었던 요사리언은 이러한 해법의 단순성을 믿을 수 없었지만,

더 진전된 질의에서도 데네카 박사는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말했다:

함정(catch)이 있었고, 그것은 Catch-22로 불리는 규정이며,

그 규정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졌다: 

'위험한 상황에서 자기 목숨에 대한 염려는 완벽히 정상적 반응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규정은 [다음과 같은 귀결]을 끌어낸다.)  

[기꺼이 폭격비행에 나선 사람은 미칠 수밖에 없고,

미치는 일은 정신의학적 요건들에 해당될 수 있다.

그는 단지 신청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더는 폭격비행을 원치 않는다는 바로 그 신청 절차는,

정상이라는 증거가 되어, 정신의학적 요건들에 해당되지 않게 된다.]

래서 폭격비행에 나섰던 이는 정말 미쳐버렸고, 따라서 해당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요사리언은 폭격비행을 원치 않았음에도, 적절히 정상적으로 대응하며,

임무를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한텐 그 어떤 이유도 없었다. 


전쟁에 휩쓸린 세계와 전체주의적 폭력을 활용하는 세계는 그 자체로 미쳐 있으며,

해서, 그 세계에서 제정신이란 광기(狂氣)와 악(惡)에 대한 분명한 표현이 된다.

그 무대가 어디든, 폭격기의 조종실이든, 또는

가장 반동적 혹은 가장 혁명적 정의를 집행하는 인민 재판의 법정이든,

인간 가치들과 소통 법칙들은 엉망진창이 되며,

혼동의 암흑은 사람들을 덮쳐 한결같이 제물로 삼는다.  

 

 




* 레미 드 구르몽 Quans la morale triomphe, il se passe des choses très vilaines

(도덕이 승리하면, 아주 사악한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라고 쓸 때, 비슷한 역설을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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