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의 책과 논문들과 NHK의 번역을 모은 게시판
Why People Dislike Radical Constructivism
         급진적 구성주의를 사람들이 싫어하는 이유.


Ernst von Glasersfeld • 
University of Massachusetts • evonglas@hughes.net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는 1917년 뮌헨에서 태어나, 북이태리와 스위스에서 자랐다. 취리히와 비엔나에서 짧게 수학을 공부했다. 1946년 이태리로 돌아와, 저널리스트로 일했으며, 1961년까지 케카토의 Scuola Operativa Italiana(언어분석과 기계번역)에서 함께 일했다. 1962년부터 미정부가 후원하는 컴퓨터 언어학 연구 프로젝트를 감독했으며, 1970년부터, 미국 조지아 대학에서 인지 심리학을 가르치다, 1987년에 퇴직 명예 교수가 되었다. 그는 여러 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11월 12일,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는 떠났다. Web site: http://www.vonglasersfeld.com



>문제
급집적 구성주의는, 수학과 과학 교육 연구에서 매우 성공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음에도, 아직 일반적으로-받아들여지는 지식 이론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목적 
이 논목은 반감(反感)의 있을 수 있는 근원들을 논한다. 

>결과들 
첫 번째 절은 생각하기와 행하기에 대한 자신의 책임,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피하고 싶은 그러한 책임에 대한 인정하기의 불가피성을 분명히 한다. 다음 절은 확실한 지식에 대한 인간 의혹의 기원을 제시한다. 세 번째 절은 “신념의 접착성(接着性) 또는 신념에 대한 집착(執着)”이라는 생각을 소개한다.  

> 함의들  
구성주의는 모든 태도들<특정 방식으로 행하는 믿음, 감정, 가치, 기질들을 포함하는 인간의 복합적 심적 상태들>과 타자들과 사회적 관계들에 대한 강력한 함의들 갖고 있다. 이 논문이 몇몇 독자들을 이러한 함의들을 연구하는 쪽으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 핵심어들  
인식론, (의식적 그리고 무의식적) 저항, 신념들



서론

급집적 구성주의는, 수학과 과학 교육 연구에서 매우 성공적인 기반(이를테면, 조지아 대학의 레슬리 스테페, 테네시 대학의 폴 콥,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의 제레 콘프리, 오슬로 대학의 안드레아스 크왈리, 보이시 주립대학의 듀이 딕스트라, 라발 대학의 마리 라로첼과 쟈크 드쏘텔, 그리고 더블린의 성 패트릭 칼리지의 휴 가쉬)을 갖추고 있음에도, 아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지식 이론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 나는 있을 수 있는 반감의 근원을 탐색하겠다.



1. 책임에서 꽁무니-빼기

     급진적 구성주의(RC)는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것에 대해 전적으로 우리한테 책임이 있다는 점을 함의하고 있기에, 대중적이지 않을 거라는, 즉, 인기가 없을 거라는 점을 나는 공식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쓰거나 말했음에도, 이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상적 상황에서라면 내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극단적인 강압적 상황들에서라면, 예외적으로 면제받고 싶어 할 것도 같다. 어떤 막강한 이(에이전트)가 당신 신체나 생명을 해치겠다고 위협하며 요구하는 것을 말하거나 행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見解)은, 사회적 상호작용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 생각으로 그러한 면제는 불가피해지는가? 마투라나가 언젠가 한 토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당신이 그러한 생각에 굴복치 않는다면 여하한 권력도 있을 수 없다” (Maturana & Poerksen 2004). 대다수 사람들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것은, 극단적 상황들에서도 당신한테는 여전히 해야만 하는 선택이 있다는 점이다: 당신은 위협적 권력을 용인하거나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 있다; 또한, 당신은 그들로 하여금 위협한 그대로 신체적 위해나 살인을 하도록 할 수도 있다. 당신이 지시받고 있거나 “할 수밖에 없는” 것에 응한다 할지라도 책임은 당신한테 있다는, RC가 주장하는, 사실은, 단지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주장은 이러한 생각하기 방식에 대한 반감의 직관적 원천이 된다.       



2. 확실성에 대한 갈증

     인지 이력의 발단(發端)에서 유아의 주요한 과업(課業)은, 운동 행위들과 그 결과로 보이는 것들과 신뢰할만한 관계들을 확립시키는 일이다. 유아들이, 만약 양 다리 이동시키기라는 특정 방식이 실제 그것들을 일정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것을 신뢰하지 않게 되어 이후 그 방식을 당연시(當然視) 하지 않게 된다면, 걷는 것은 결코 배우지 못할 것이다. 젖먹이에서 십대 그리고 종종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인지적 도제(徒弟)한테, 경험 해석과 언어 표현에서 모호성(多義性)은, 그것을 농(弄)이라 하지 않는 한, 혐오 대상이다. 대체로 성공적인 연기자한테 그의 연기 구상(構想)이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 때까지는 엄청난 많은 실패들이 요구된다. 지금까지 작동했던 것은 항상 필히 작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은, 그저 기대(期待)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작동하고 있기에 독립된 실재의 구조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 또한,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3. 신념에 대한 집착

     “Die Klebrigkeit der Libido[리비도에 대한 집착(執着)]”은 지그문트 프로이드가 만든 표현이다. 평소 쓰는 말로, 꽉 달라붙은 걸 때어 내는 것은 어렵다. 프로이드의 표현을 빌리고 있는 까닭은, 틀릴 수 있는 지식으로 간주되는, 이른바, “정당화된 신념”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커피 자동판매기가 넣은 동전에 맞는 커피 제공하기로 응답하지 않는 경우, 당신은 발로 차며 망가졌다고 확신한다.(역주: 이러한 바가 바로 신념 혹은 믿음의 기원이며, 오류 가능성이 있음에도 통상 그러한 신념의 접착성은 매우 강하다.)
  

     인지 발달의 바로 시작부터 우리한테 주어진 것은, [우리가 지각하는 무엇은 “사물(事&物) 자체”로서 실재하는 world(世上)의 일부로서 거기 있다]는 인상(印象)이다(역주: 인상의 사전적 의미는 ‘상당한 자신감을 지닌 모호한 관념’이다). 단어나 말은, 그러한 실재 world(世上)의 사물들을 지시하고 있기에, 모든 사람들한테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칸트가, 바이힝거가 쓴 것처럼, “사물-자체”를 그리고 모든 누머논(noumen)적 수준을 발견적 허구로 보았다고 말해주는 이는 아직 없다. 

“Jede Vorstellung als Erscheinung wird als von dem. was der Gegenstand an sich ist, unterschieden gedacht,… das Letztere aber, X, ist nicht ein besonderes ausser meiner Vorstellung existierendes Objekt, sondern lediglich die Idee der Abstraktion vom Sinnlichen, welche als notwendig anerkannt wird.” (Kant Opus postumem, Vol. XXI, quoted in Vaihinger 1986: 723) 

“현상으로서 모든 재현(表象 혹은 再演)은 사물 자체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  그럼에도, 후자, X는 우리 재현(過程) 바깥 쪽 대상으로 실재하는 분리된 사물이 아니라 필수로 여겨지는 감각적인 것들에서 추상된 나의 관념에 불과하다.”(필자의 영어 번역에 대한 역자 번역)    

     그와 같은 재현은, 주체 홀로 다룰 수 없는 과업들에서 타자들과 협력(共動-作業)이 가능하도록 생성(生成)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학 그리고 이론적 토론에서 신념들에 대한 집착은, 화자(또는 필자)한테는 종종 보이지 않지만, 편파적이지 않은 관찰자한테는 명백한 방식들로 보이게 된다. 나는 RC와 인식론 일반에 박식하며 정통한 한 저자한테서 취한 몇몇 사례들을 인용할 것이다. 

     잡지, 사이버네틱스와 인간 알기(1993)에 그리고 칼 야스퍼스 포럼(2004)에 기고한 이래로, 데이비드 케네쓰 존슨은 RC에 대한 가장 일관된 비평가다. 그는 또한 구성론 저작들에 맞서는 데에 있어 가장 정통한 인물이며, 그에 맞선 인식론 이론을 완전히 발전시켰다. 그의 반대를 다루는 것으로서, 그밖에 여타 이들이 제기한 더욱 수수께끼 같은 비판들 가운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은 것들이 포괄되리라 믿는다. 존슨은 최근 (매튜 실리만과 함께) Bridges to the World<세상으로 이어지는 다리들>(2009)을 출판했다: 이 책은 대체로 세 명의 허구적 인물들 사이 지식 이론들에 대한 토론이다; 러셀은 존슨 자신의 관점을 대변하고, 한스는 급진적 구성주의자이고, 그리고 앨리슨은 화제에 관심이 있지만 날이 서 있지는 않은 문학 교사다. 

     존슨은 RC에 대한 초기의 격렬한 비난 언설에 비해 굉장히 원숙해졌으며, 그 대화에서 그의 대변인인 러셀은 그가 구성주의 원리들을 이해했다는 많은 증거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실재론의 일정 형식에 대한 그의 집착은 약해지지 않았다.**

** 존슨과 그밖에 이들은 “구성론적 실재론”의 버전(見解)들을 정식화했다: 구성론적 실재론이란, 실재에 대한 인지적 접근불능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에 대한 이치에 맞는 하지만 틀릴 수 있는 가설들을 생성시킬 수 있음을 고수하는 생각하기 방식이다. 이들 가설들이 참(眞:true)인지를 결단코 보일 수 없기에, 이것들은 바로 칸트와 바이힝거가 “발견적 허구들”이라 불렀던 것들이다. 구성론적 관점에서 그와 같은 허구에는, 그것이 실재에 대한 재현으로 제시되지 않는 한, 잘못된 것은 없다.
 
 아래는 대화 시작부의 러셀의 진술들 가운데 하나다:

“우리 구성(過程), 이야기, 그리고 이미지들은, 결국,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사물들 그리고 그러한 관계들이 아닌, 주관적 구성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고안되어 재현(表象)하고자 한 사물들에 관한 더 나은 정보로 인해서 그것들은 정정(訂正)된다.” (Johnson & Silliman 2009: 8)

     이 구절에는 여러 가지가 함의되어 있다.

1 | 그러한 우리 구성들은 사물들을 “재현(表象)”하기 위해 “고안된다.” 어떤 사물들을? 인용구 둘째 문장은 그 구성들이 “객관적으로 실존하는 사물들 그리고 그러한 관계들”임을 함의하고 있다.
2 | 그러한 관계들은 객관적 실존을 보유하고 있다.(역주: 달리 말해, 사물들의 객관적 실존을 유지시키는 것은 그러한 관계들이다.) 이는 또 다른 신념으로, 발견적 허구(heuristic fiction)에 대한 신념이다.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두 나무 가운데 더 큰 나무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를 확립시키는 것은 그저 비교일 뿐이다. 그것은, 모든 관계들처럼, 지각자의 조작(過程)의 결과다. 이러한 결과는, 내가 다른 지각자의 같은 조작 수행하기를 관찰하는 경우, 더 이상 “실재하는” 것이 될 수 없다.(역주: 관찰한 또는 그러하리라 추정한 그 조작들은 바로 관찰자 자신의 조작이기에.)
3 | 그러한 우리 구성물들은 사물들을 그 자체로 재현(表象)하기 위해 고안된 것들이다.
4 | 그러한 우리 구성물들은 고안되어 재현하고자 한 사물들에 관한 더 나은 정보로 인해 정정(訂正)된다. 이는, (3)을 인정하는 경우, 우리는 “정보”를 “그 자체로서 사물들”한테서 얻고 있다는 주장이 된다. 

     장 삐아제 이래 구성론자들이 지치지 않고 반복했던 바와 같이 그와 같은 정정(訂正)들이 환상인 까닭은,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것은, 필히 경험에서 주관적으로 추상된 것들로 조성되는 것이지, 객관적 실재에 대한 (결점이 있거나 정정 가능한) 재현(表象)이 아니기 때문이다. 

“Au nom de quel critère – s’il en existe de tel –
sait-on que l’on atteint le donné en tant que donné?”
(Jonckheere, Mandelbrot & Piaget 1958: 22)** 

** 도데체 어떤 기준에 -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할 경우 - 입각해야, 주어진 것을 그 자체로 파악(把握)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필자 영어 번역에 대한 역자 번역)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좋은 또는 나쁜) 재현(表象)임에 틀림없다는 신념은 초기 그리스 철학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때 이미 소크라테스 이전 몇몇 철학자들은 그와 같은 재현(表象)이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었다. 흄과 칸트가 제시한 강력한 논증들 역시 그러한 신념의 일반적 수용(受容)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대화가 앨리슨의 학생, 구성론적 생각을 지닌 쥴스한테서 온 두 쪽짜리 레터로 촉발되고 있기에, 토론자들의 논증들에 대한 정확한 의미 구성에는 보통 때보다 더 긴 인용들이 자주 요구된다. 

“러셀: 기꺼이 설명하지. 명제, ‘내가 살고 있는 world를 내가 구성한다’에는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지. 그게, 내가 하기로 선택한 것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다는, 그래서 그 world가 존재하는 방식에, 적어도 나한테 나타나는 그 world의 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뜻이라면, 그렇다면 나로선 반대할 게 전혀 없지. … 그렇지만, 쥴스의 진술이, 말인즉, ‘내가 경험한 world는 전적으로 나 자신의 구성(過程)이다’를, 실제로, 말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건 유아론적이며 명백한 거짓(false)이지.(역주: ‘우리’와 ‘나’의 차이, 그리고 'world의 다의성'을 참작하시오. 여기 러셀의 ’world’는, 다의성을 구별했다면, ‘세상’으로 독해되는 것이 맥락상 어울리지만, 러셀한테 그 구별은 보이지 않는다.)     

“한스: … 실재에 대한 유아론자의 앞뒤 다 자른 관점이 터무니없다는 것에는 동의해. 그렇지만, 그게 구성주의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확신이 결코 들지는 않아. 결국, 쥴스가 멋지게 지적하고 있듯이, 구성주의는 알기 이론이지 존재에 대한 이론은 아니란 거지.” (Johnson & Silliman 2009: 9–10)

     여기에는, 우리가 지식이라 부르는 것은 정의상 실재하는-world(世上)의 측면들을 반영하고 있음에 틀림없다는, 신념의 끈쩍끈쩍함, 소위, 신념에 대한 “집착(stickiness)”이 있다; 그러한 신념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추상된다는, 경험에 속한다는, 그리고 그 경험적 경계 너머 그 무엇과도 입증 가능한 여하한 관계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몇 페이지 이후, 토론은 방향을 바꿔 버클리의 관념론적 인식론에 대한 존슨 박사의 유명한, 길가 돌부리 차기** “반박”으로 이어진다.  

**  kicking a stone (a “rock” in American English) on the road (역주: 이어지는 러셀의 인용문에서는 “stone”이 아니라 “rock”으로 쓰고 있어서 괄호 설명이 들어간 것임)

“러셀: 하지만, 돌부리는, 우리 생각으로서 돌부리와 대비해서, 확실히 생각의 외부에, <버몬트 길에 있는 돌부리에 채인 앨리슨의 비틀거림을 ‘그 돌부리를 최초로 존재로서 생각하는 일 없이도’ 홀로 설명하는> 사실로서, 존재하고 있다. 우리를 놀래키는 세상의 능력(capacity of world)은 우리 구상(着想)이나 지각 이전에 그리고 그 너머 있는 훌륭한-증거(確證)가 된다.” (ibid: 17) 

     ‘world(世上)란 우리가 그것을 보는 방식으로, 우리가 그것을 경험하기 이전에, 구조화된 것임에 틀림없다’는 신념(信念)만이, <앨리슨을 비틀거리게 했던 것은, 누군가 그것을 지각적으로 구성하기 이전, 우리가 “돌부리”라 칭하는 지각 아이템이 속하는 종류였다>는 가정(當然視)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한 신념은, <우리 감지들(senses)이 외부 world(世上)에서 이미 만들어진 “데이터”를 나르고 있음>을, 그것들이 그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거나 입증할 구상 가능한 여하한 방식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연시 하고 있다. “돌부리”라는 개념, 그리고 그것이 속할 world(世上 혹은 世界)는 누군가 채여 넘어지고 나서야 “왜” 넘어졌지 하고 의아해 한 이후에야 생겨난다.     



결론

     구성론에 반대하는 문헌들은 방대하며, 그것들의 주장들 모두를 검토하는 것은 책 한권 분량 정도가, 그리고 자주 되풀이 되는 노고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상이한 형식들로 돌출하는 몇몇 논증들에 집중했다. 구성주의의 기본 테제들을 반복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것들은 많은 독자들이 명료한 언어로 기술되었다 평했던 논문과 책들에 제시되어 있다. 사람들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는 이유는, 이 논문 출발점에 제기했던 것처럼, 특정 전통적 신념들을 포기(斷念)하는 것을 꺼려(躊躇)하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이러한 주저함, 집착에 대한 아주 분명한 사례 하나로 글을 마무리 한다:      

“… 인식론적 급진주의는 개연성(plausibility)이 결여되어 있다고 진술될 수 있다. 우리 세계관의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구성(過程)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변함없이 비판적 실재론의 조망을 채택할 수 있다는 아주 많은 증거들이 있다. (Saalmann 2007: 1)

     개연성에는 그럴싸한(이치에 맞고 타당한 혹은 참(眞)일 수 있는) 무엇가가 있을 수 있다는 시각을 갖는 일종의 신념 체계가 필요하다. 그것은 통상 그 저자가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는 시스템(體系)이다. 아주 많은 증거들이 있다는 살만의 주장은, 그와 같은 주장은 결코 입증될 수 없는 것이기에, 공허한 것으로 남으며, 그 저자 마음에 지닌 실재론적 조망이, 그밖에 모든 실재론의 형식들과 마찬가지로, “리(Truth)”의 증거로서 취하는 것은, 바로, 일정 사물들이 우리 경험 영역에서 기대한 바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경험은 결단코 존재론적 가정(當然視)들을 시험하는 무대로 사용될 수 없다.         



잭 록헤드의 후기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는 “급진적 구성주의는 주류의 사업(企劃)이 될 수 있는가”라는 Constructivist Foundation 특별판의 이 대목을 열정적으로 쓰는 동안, 그의 기력은 쇠해지기 시작해서 이 논문을 수정할 때에는 최종 교정을 검토할 수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논문은 미완성 작품이자, 에른스트의 마지막 논문으로서, 그가 더 강건했다면 표명했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 논문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중요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논문은 그의 마지막 날들 끝까지 에른스트가 급진적 구성주의의 가장 급진적이며 우리가 받아들이기에 가장 어려운 그러한 요소들을 단호히 주장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에른스트는 우리 구성(過程)들과 우리가 실존한다고 믿는 외부 실재 사이 뭔가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는 결단코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음에도, 그런 관계가 무엇일지 우리가 알 가능성을, 혹은, 그런 용어 “실존한다”가 해석되어야 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거부한다. 이 논문에서 그가 제시한 논증들은 새로이 생성되는 모든 논쟁들을 위한 비옥한 지반이며, 이 논문이 와인 몇 병이 비워지는 사이 기초를 하나씩 구성해낼 것이라는 나의 바램을 그가 함께 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원문은
  http://www.univie.ac.at/constructivism/journal/articles/6/1/019.glasersfeld.pdf


참고 문헌들

Johnson D. K. (1993) The metaphysics of constructivism. Cybernetics & Human 
   Knowing 1(4): 27–41.
Johnson D. K. (2004) Fallibilistic realism and skeptical worries. Karl Jaspers Forum 
   TA 73, Commentary 16. Available at http://www.kjf.ca/73-C16JO.htm
Johnson D. K. & Silliman M. R. (2009) Bridges to the world. Sense, Rotterdam.
Maturana H. R. & Poerksen B. (2004) From being to doing. The origins of the 
   biology of cognition. Carl Auer, Heidelberg.
Jonckheere, A., Mandelbrot, B., & Piaget, J. (eds.) (1958) La lecture de l’expérience. 
   PUF, Paris.
Saalmann G. (2007) Arguments opposing the radicalism of radical constructivism. 
   Constructivist Foundations 3(1): 1–6. Available at 
   http://www.univie.ac.at/constructivism/journal/3/1/001.saalmann
Vaihinger H. (1986) Die Philosophie des Als Ob. Reprint of the 9th Edition. Scientia,
   Aalen. Originally published in 1927. English translation: Vaihinger H. (1952) The 
   philosophy of “as if.” Translated by C. K. Ogden. Routledge, London.


Received: 16 May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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