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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과 연역

2014.12.31 20:06

나공 조회 수:895

 

Representation and Deduction

 

 

In: L. Streefland (Ed.)

Proceedings of the 9th International Conference

on Psychology of Mathematics Education,

Vol. 1. Utrecht, The Netherlands:

State University Utrecht,

484489. 1985. 091

 

 

요약: 개념 구조들의 재-상연(re-play)을 가리키는 재연(Re-presentation), 외적 사물에 대한 심적 이미지라는 대중적 관념과 대비된다. 필자의 주장은, 모든 연역적 절차들은 조작적 루틴들뿐만 아니라 감각운동 내용의 재-상연(-上演)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며, 필자는 이를 고전적 삼단논법으로 입증하고 추가적 보기를 든다. 논리학과 수학 모두에서 연역적 능력의 생성은 귀납적 추론의 반복적-배우기(演習)에 기초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for the roses had the look

of flowers that are looked at

T. S. Eliot1

 

 

내 논문의 출발점을 분명히 하고자 고른 윗 에피그라프는, 이론을 통한 사색 또는 숙고의 용도로 제공한 것이지, 경험적 연구에 기초한 보고(報告)로 의도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르치기에 모두 관여되어 있으며, 시인들은, 모두 동의하리라 확신하는 바, 이 영역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이들이었다. 그들이 의도치 않게 그것을 성취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지식 전달 또는 계몽에 대한> 敎授的 野望의 부족이,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배우기에 장애(障碍)가 되었던 것 같지도, 학습자들의 배우기 열망을 감퇴시킨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러한 주장을 위한 통계적 증거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것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더 밀고 나가고자 한다. 시인들은, 독자나 청자들한테 이미 만들어진 생각, 이미지, 그리고 관념들을 넘겨줄 수 없다는 점을, 아마 다른 어떤 이들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들한테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단어들뿐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단어들이 있기에, 그들은 결국 그들 자신들의 생각 그리고 이미지들을 산출할 것이다; 그리고 단어들을 특정하게 조합함으로써, 최소한 온당하게, 최종적으로 독자 또는 청자들이 그 텍스트에서 발견하리라 믿는 의미, 개념 구조를 안내할 수 있다.

 

     시인들은 또한 청자나 독자한테 그/그녀의 해석이 틀린것이라 말하는 것은 무용(無用)하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폴 발레리 왈:

 

일단 공표되면, 텍스트는 원하는 대로 목적에 따라 누구든 쓸 수 있는 기구(器具)와 같은 것이다; 만든 이가 다른 이들보다 그것을 더 잘 사용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게다가, 그는 그가 만들기 원했던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지식은 그가 바로 만들었던 것에 대한 그의 알아차림을 항상 방해한다. 2

 

     수학 교사들은, 통상, 그들이 설명하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 지식은 예외 없이 그들 설명에 대한 자신들의 알아차림을 방해한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확실한 것들은 자명한(self-evident)” 것으로 당연시 하며, 수학에서 명백(evident)하게 보이는 것은 언제나 특정 수학적 연산(操作)들을 수행하는 습관들에 달려 있다는 점을 잊어버린다.

 

     숙련된 언어 사용자들로서, 우리 모두는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효능(效能)에 대한 정당화될--없는(不當) 믿음을 발달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발화한 단어들이 자동으로 청자한테서 우리가 표현하고자 했던 특정 개념과 관계들을 불러낼 것이라는> 점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행한다. 우리는 말하기가 관념 또는 심적 재현들을 나른다는 환상에 집착하고 있다. 하지만, 단어들, 말해지든 쓰이든, 그것들은 그 어떤 것도 나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직 이미 거기에 있는 것들만을 불러낼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새로운 조합들을 자극, 촉진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우리 단어들이 청자한테서 불러냈던 재현들을 우리가 검사할 때마다 분명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과정에 관한 우리의 부당한(정당화될--없는) 전제들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재현(representation)”이라는 일반 관념에서 비롯되는 잘못된-착상(誤槪念)이다. 이 용어는 심리학과 인지발달에서 사용되면서, 한 가지 이상의 방식으로 다의성을 보이고 있다. 우선, “representation”, “-ion”으로 끝나는 많은 단어들처럼, 활동 또는 그 활동의 결과를 가리킬 수 있다. 이러한 다의성으로 야기되는 곤란은 드물다. 하지만, 훨씬 더 심각한 것은 이 단어로 불러일으켜진 인식론적 다의성이다. 그것은 (심신에 혹은 도덕적으로) 해로운 개념적 혼동을 야기시킨다.


     내가 분명히 만들고 싶은 구별은, 이를테면 독일어에서, DarstellungVorstellung이라는 두 단어로 표현되고 있는 두 가지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 둘 모두 영어에서 “representation”으로 통상 해석, 번역되고 있다. 전자가 가리키는 아이템은, 그 아이템이 지시 또는 준거하는, 아이코닉한 의미에서 또 다른 아이템, “원본(original)”에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후자가 가리키는 개념 구조는, 복제나 사진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명시적 지시 또는 준거를 갖고 있지 않다. (실상, Vorstellung“idea(觀念)” 또는 “conception(着想 혹은 그 결과로서 槪念)”과 같은 영어로 번역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역주: 이 단어를 한국어, 표상(表象)으로 번역하는 것은 관념 또는 착상이 추가적으로 전자의 의미를 함의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기에, 야기되는 혼동은 제거될 수 없다>)

 

     따라서, “representation(再現)”을 두 번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 “re-presentation(再演)”으로 표기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re-”는 전에 경험했던 것의 반복을 지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이는, 심적 재현들이 실재세상에 있는 대상들에 대한 복제 또는 이미지들이라는 환상을 완화시킬 것이다. 혹자가 자신한테 재연한 것은 결단코 독립된 외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그가 일종의 추상을 통해 경험에서 끌어낸 개념적인 것을 재-상연한 것이라는 사실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3

 

     이전 구성물들을 자신한테 다시-보여주는 능력은 모든 인지 활동들에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 능력은, 당신이 지금 먹고 있는 수플레가 20년 전 디종에서 먹었던 것만큼이나 최고로 맛있는 것인지 아닌지 당신 자신한테 물을 때, 작용하게 된다. 감각 경험들을 비교할 때마다, 비교되는 것들 가운데 하나가 당신의 실제 지각장(知覺場)에 없는 경우, 그 경험은 재연되어야만 한다. 그것이 더욱 오래 묵은 것일 경우, 그와 같은 과거 감각 경험들을 재-상연하는 데 필요한 기억을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멀리 있는 과거의 수플레(그리고 그밖에 부도덕하고 사악한 경험들)은 현재의 경험들보다 더 달콤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논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아니다.

 

     재연하는 능력은 상징의 사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결정적이다. 상징을 그것이 표현하기로 한 것과 묶는, 소위, “의미론적 연결(semantic nexus)”, 상징 사용자가 그 상징의 의미를 재연할 수 없는 경우, 그 기능을 멈춘다. 기억은, 분명, 상징 영역에서도 감각 경험의 영역에 못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수학의 기초와 관련해 채택했을 수 있는 특정 입장과 무관하게, 누구든 “+,” “,” “x,” 그리고 “:”와 같은 상징들은 조작(演算)들을 지시하고 있으며, 사실, 명령들(더하라!, 빼라!, 곱하라!, 나누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와 같은 명령 하나를 따르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시하는 조작뿐만 아니라, 이행되는 방식 또한 알고있어야만 한다; 우연히 가까이 있게 된 그 어떤 것들로 상징화된 조작을 재-상연하는 방식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말하자면, 연산-기호들이 상징(象徵)들로 기능하고 있다면, 그것들이 지시하는 조작(演算)들은, 상징 사용자 자신의 이전 경험에서 그 조작들 이행에 함께 했던 감각운동 소재들에서 그 상징 사용자가 추상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추상에는 여러 수준들이 있지만, 그 바닥에는 감각운동 소재들이 있어야 한다.)

 

     연산-상징과 그것이 가리키는 추상된 조작 사이 의미론적 연결이 논리학에서 불가결한 것은 수학에 못지않다. 콰인은 논리학의 진리들은 논리학 어휘들이 갖는 의미들에서 분리 불가능하다에 대해 말했다.4 논리적 진리는, 물론, <선택된 전제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연역적 추론의 신뢰성을 지시하고 있다; 그것은 경험적 기초나 전제들 또는 그 결론들과는 관련이 없다. 전제들, “모든 사회주의자는 악()이다스누피는 사회주의자다로 삼단논법(syllogism)을 행할 경우, 전통적 삼단논법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처럼, 논리적으로 스누피는 악이다란 결론에 이를 것이다. 연역의 논리적 (眞理)”은 전제들의 경험적 거짓으로 손상당하지 않는다. 삼단논법의 논리가 사유자의 경험 세계에서 그럴 것처럼 또는 그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과 전혀 묶여 있지 않다할지라도, “논리적 어휘에 속하는 단어들을 써서 불려나오는 조작(演算)들을 규칙들에 따라 이행하는 일은, 그럼에도, 하나의 활동이며, 그러한 바, 능동적인 생각하기 에이전트를 필요로 한다. 흄은 이를 보았고, 그래서, <연역은, 심리적 과정을 수반하고 있기에, 고전적 논리학자들이 믿고 싶은 만큼 무오류적인 것일 수는 없다>고 결론내렸다.5 이러한 의심을 도입하는 것이 적법하다면, 결국 수학적 조작의 영역에서도 의심은 마찬가지로 횡행(橫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논의하는 것은 한가한 일일 수가 없다: 흄의 개념이, 내 믿기로, 재현 이론과 묶일 수 있다면, 특히, 그렇다.

 

      연역 논리가 관여되고 있는 한, 전제(前提)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事實)에 대한 진술들로 간주되기보다는 항상 명확히 단정(斷定)된 것이어야 한다. 그 단정된 것들과 경험 세계와는 무관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치 의심할 수 없는 것처럼, 한 동안 허용되는 가설처럼, 그것들은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가설적 지위는 결론에 이를 때까지 항상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 항상 다음과 같이 명확히말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사람이라’,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첫째, 다루고 있는 가정들의 경험적 타당성은 그것들을 다루는 동안에는 의심치 않기로 결정했다는 점; 둘째, 그 결론에 부여한 논리적 확실성은 논리적 용어들, “~(if)”, “모든(all)”, 그리고 그렇다면(then)”로 불려나오는 조작들에 속한다는 점이다. 이들 두 가지 측면이 바로 연역적 절차의 무오류성에 대한 우리 믿음의 기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삼단논법에 대한 믿음을 전복시키려는 시도로,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전제를 사실(眞理)로서 정식화시키기 위해서는 사람이라 불리는 부류에 대해 그들 죽음과 관련해서 그 모든 성원들을 검사해야만 할 것이다>라는 주장했다. 그리함으로써 그 어떤 예외도 없다고 할 경우, 소크라테스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 그 유한성을 검사받았음에 틀림없기에,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른 한편, 그가 아직까지 검사받지 않았다면, 이는, 그가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았거나 전제에서 용어 모두가 부당(不當)하게 사용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깔끔한 논증이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밀은 삼단논법의 전제들을 의도적 당연시(假定)들로 보지 않고 경험적 사실들에 대한 진술들로 보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바가 이해되면, 그 논증은, 이제 더 이상 삼단논법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연역적 추론들은 경험 영역에서 자동적으로 (眞理)”이 되어야 한다는 잘못된-생각(誤槪念)에 대한 반대가 된다.


     하지만, 또 다른 문제들이 있을 수 있다. 삼단논법의 전제들이 가설로 의도된 (말인즉, 의심치 않기로 합의된) 개념 구조들로 이해되고 있을지라도, 변함없이 연역적 절차, 몇몇 단계들을 수반하고 있는 절차는 검사하고 싶을 것이다. 전제들을 구성하고 나면, 필히 논리적 어휘의 글자들로 지시되는 논리적 조작(演算)들을 불러내야만 하고, 이어, 이들 조작들을 전제된 개념 구조들의 재연(再演)들로 재-상연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결론에 이르기 위해, 대전제로 만들어진 개념적 구성물은, 최소한, 소전제로 개념적 구성물을 만들 때, 그리고 결론을 산출하도록 두 전제를 관련시키는 논리적 조작들을 진행시킬 준비가 될 때, 재연(再演)에 이용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이에 변함없이유지되고 있어야만 한다.

 

     논리적 용어로 불려나온 연역적 조작들이 인간 마음의 고유한, 아 프리오리, 레파토리의 일부라고, 칸트와 같이, 믿는 말든, 그것들은, 매 순간마다 새로이 창조되는 것이기보다는, 그것들은, 미리 프로그램된 서브루틴들과 마찬가지로, 연합된 상징 또는 상징 열()이 적절한 맥락에서 에이전트의 주의를 받고 있을 때, -상연된다.6 사정이 이러하다면, 논리적 조작들 수행하기에는 기억의 일정 형식이 요청될 것이며, 기억은 심리적 현상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기에, 흄의 의심(Hume’s doubt)을 상기하는 쪽으로 끌릴 것이다.

 

     기억을 보다 분명하게 문제시 하게 되는 것은, 전제들의 특정되지 않은 논리적 성분들에 응하여 생성되는 가설적 개념 구조들, , 논리적 조작들이 적용되어야 하는 가설적 개념 구조들을 마주하게 될 때다. 모든 연역적 절차들에 요청되는 것은, 우리가 사용할 개념 구조들과 조작적 루틴들을 그 자체로 유지시키는, 그리고 재연하는 우리 능력을 우리가 신뢰하는 일이다. 우리가 이러한 능력을 의심할 경우, 모든 논리들은 내팽개쳐진다. 그런 방식에 우리는 맘(注意)이 가지 않는다. 그러한 방식은 컴퓨터의 메모리나 그밖에 모든 장치(모듈)들을 의심하는 것만큼이나 파탄(破綻)을 야기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논리적 조작들의 획득 방식에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직업적 철학자들은, 통상 생각의 발달적 측면들에 대한 여하한 고려도 발생적 오류(genetic fallacy)”로 일축(一蹴)하며, 논리학자나 여타 논리 조작 사용자들이 필요한 절차들을 구성할 필요가 없는 척, 그들이 그것들을 항상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이 그들 마음에 이미 있는 척 가장(假裝)한다. 삐아제처럼, 나도 이를 터무니없는 주장이라 판단(判斷)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 대신, 나의 제안은, 귀납적으로 도출된 규칙들의 경험적 성공이, 바로, 상징과 연합되면서 경험에 대한 지시 없이 사용되는 특정 논리적 조작들을 추상하기 위한 계기(契機)들과 동기(動機)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조망에서 볼 때, 삼단논법 절차 구성에서, 특정 논리적 용어들이 아닌 전제들의 성분들은 반드시 능동적 에이전트가 해석해야, 그 에이전트 경험 맥락에서 이치(理致)에 맞게 혹은 납득(納得)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필수 반성적 추상들은, 우리가 경험에 비추어 철회한 규칙들보다는 작동하고 있는 규칙들을 사용할 때,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십중팔구 맞을 것이다. “내가 보았던 모든 장미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와 같은 식의 잠정적 규칙을 정식화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이 꽃은 장미처럼 보인다 고로 그것은 달콤한 향기가 날 것이다라고 말할 맘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해, 우리한테 귀납적 추론들을 동반한 성공이 없었다면, 연역적 추론들을 진행할 수 있을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마무리로, 이러한 일련의 생각을 수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수들이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적용하고자 한다. 아이는 의심할 바 없이 “5 + 8 = 13”와 같은 표현을 외워서 배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이해하하기 위해서는, 그녀는 반드시 수반된 상징들의 의미를 재연할 수 있어야 한다. 삼단논법에서처럼, 그와 같은 수 표현들 하나하나에는 당연시(假定)들이 수반되고 있다. “5”의 의미란, 셀 수 있는 아이템들로 조성된 여럿 하나에 대해, 그 아이템들이 세어질 경우(, 수 단어들이 그 아이템들과 일대일로 정렬될 경우), 그것들은 수 단어들을 하나부터 다섯까지 소모시키는 걸 당연시 한다는 점이다. 그때, “+”(記標)로 지시(記意)되는 것은, 자체로는 수 단어들 하나에서 여덟까지를 소모할 (아이템들로 조성된) 두 번째 여럿이 다섯다음에 따라 이어지는 수 단어들로 세어져야 한다는 점이다.7 아이들은 <이들 여럿들><상이한 많은 방식들로 세는 활동들>을 재연할 수 있다. 그들이 그러한 추상된 패턴들을 실행(適用)하며 사용하는 감각운동 소재는 (그 실행 자체와는) 무관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들 패턴들을 추상했으며 그것들을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맥락에서 재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의 주장은, 고로, 그들이 이러한-종류의-재현(再演)의 생성에 필요한 견고한 설비를 획득하기만 한다면, 그들은 수학적 환희의 정원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주

 

1. Eliot, T. S. Burnt Norton, London: Faber & Faber, 1914; p.10.

 

2. Valery, P. Au sujet du cimetiere marin (1933). In: Oeuvres de Paul Valery, Paris: Galimard, La Pleiade, 1957; p.1507 (my translation).

 

3. Piaget, J. La formation du symbole chez l’enfant (1945). Neuchatel: Delachaux et Néstle, 7eme edition; p.237.

 

4. Quine, W. V. Carnap and logical truth. In The ways of paradox.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66; p.109.

 

5. Hume, D. A treatise of human nature (1739-40), Book I, Part IV, Ch. i.

 

6. Wittgenstein, L. On certainty. New York: Harper Torchbooks, 1969; 1522/523, p.69.

 

7. Steffe, L. P., von Glasersfeld, E., Richards, J. & Cobb, P. Children’s counting types: Philosophy, theory, and application. New York: Praeger, 1983. Ernst von Glasersfeld (1985) Representation and Deduction 6

 

 

감사

 

레슬리 스테페한테 이 논문의 최초 버전에 대한 비판적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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