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의 책과 논문들과 NHK의 번역을 모은 게시판
지식에 대한 모든 도구론적 접근들한테, 
19세기 가장 중대한 사건은 
다윈의 진화론 출판이었다. 

그 적절한 연결을 만든 
아마도 최초 인물은 
윌리엄 제임스였다. 

제임스는 
그의 출중한 에세이에서, 
다윈의 정확한 ‘선택’ 개념으로 
허버트 스펜서의 공허한 사회학적 단정(斷定)들과 맞붙었다. 

새로운 구상들의 기원에 대해 말하길:  

그것들은, ... 맨 처음 산출될 때, 
지나칠 정도로 격렬한 인간 두뇌의 기능적 활동으로 인한 
자발적 변이에 해당되는 마구잡이 이미지, 공상, 돌발적 분출 양상을 띠며, 

이것들에 대해 외적 환경은, 그저, 
확증 아니면 반박, 
채택 아니면 거절, 
보존 아니면 파괴로 대응할 뿐이다 – 
요컨대, 
유사한 부류의 우연한 분자적 사고들로 생긴 
형태적, 사회적 변이들이 선택되는 것과 비슷하다. 
(James, 1880, p.456) 

     다음 페이지에서, 
이러한 생각을 과학 탐구자한테 적용할 때, 분명해진 바, 
그가 느슨한 표현 ‘외적 환경’으로 지시한 것은 
독립된, 객관적 세계가 아니었다: 

가설은, 
다산성(多産性)이 그 첫째 조건이며, 
경험과 충돌하는 순간 
기꺼이 버려지는 바가 그 다음이다. (ibid., p.457)   

     그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지, 
그 자체로 있을 세상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 경험과 실재 사이 관계에 대해, 제임스는 미묘한 만큼 심오한 거라 말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어디선가는 반드시 경험 가능한 것이어야 하며, 모든 종류의 경험된 사물은 어디선가는 실재하는 것임에 틀림없다’(1912, p.159 ; 강조는 내 것). ‘종류’를 이탤릭체로 강조한 건, 제임스의 구별이 쉬이 간과될 것이기 때문이다 : 버클리처럼, 그도 어디선가 경험될 수 있는 그러한 사물만을 ‘실재하는’ 걸로 칭한다 ; 그리고 사물의 종류들, 즉, 우리가 추상한 개념들은, 그가 정의한 의미로 반드시 ‘실재하는’ 것들에 기초해야 한다 —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공허(空虛)한 것이, 혹은 비코 말로, ‘시적 은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렇다는 것은, 
그의 실용주의 이론 맥락에서 
그가 진술한 많은 것들로 알 수 있다 (e.g. James, 1907; p.49).
 
     가설이 
경험에서 확증될 경우에만 
유지된다는 생각은 
분명 새로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생명체의 환경에서 살아남기와 
유사하다는 건 혁명적이었다. 

가설은 살아남아야, 이론이 되고, 
이어 추가 확증으로, 
객관적 실재를 재현(表象)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실적 설명 또는 법칙이 된다고, 생각되었다. 

이제, 
과학과 인간 지식 일반의 진보(進步)는, 유추로, 
다윈의 생물학 이론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지속적 진화(進化)로 보일 수도 있다.

 
     이러한 견해(視角)는 빠르게 퍼지며, 
철학적 관념이 유포용으로 자주 단순화되는 것처럼, 
하나의 슬로건으로 압축되었다. 

실용주의는 
‘진리란 작동(通)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운동으로 알려졌다. 

살아남아 재생산 가능한 것은 
생물학적 진화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에, 
개념과 아이디어들 영역에서도, 
그 기준은 간편하고 유익한 걸로 여겨졌다. 

제임스도 가끔씩 이러한 해석에 기여했는데, 
이를테면, ‘실용주의적 견해’에 대해 쓸 때였다:     

… 우리의 모든 이론은, 
일종의 도구로서, 
신성한 신비-세상에 대한 계시(啓示)나 
영지적(靈智的) 답변이기보다는, 
실재에 대한 적응의 심적 양식(樣式)이다. 
(James, 1907/1955, p.127) 

     한편, 
‘경험에서 확증’이 훨씬 더 복잡한 사안이 되는 건, 
그것이 생물학적 반응이나 속성을 수반할 때보다 
개념적 구조를 수반할 때다. 

개념적 수준에서 ‘적응 양식’은 
유기체의 몸 수준에서 적응 양식과 같지 않다 
(개념적 평형은 3장에서 논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이 
일찍이 표명했던 바, 진화론적 접근으로 

제거되는 것은, 
<독립된 진리 자체>, 그리고 
… 알게 되어지는 세상과 실용적 상호작용에서
<경험 또는 선택>이라는 
이원론이다 –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의 결과에 대한 경험이란 
동시에 진리 창조이기 때문이다. (1895, p.44)

     달리 말해, 
<오직 실재 세상을 반영하는 지식만을 
참(眞)이라 칭해햐 한다>는 요청은 폐기되고 
그 자리에, 
<지식은 우리 경험 세계에서 
우리 목표 달성에 기여하는 것으로 발견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들어선다. 

이러한 대안적 시각과 관련하여, 
세상 경험 방식이 
경험 환경 개념화를 돕는 가설과 지식에 
의존한다는 점이 분명해지면, 
문제 하나가 부상한다. 

그 문제란, 
하이젠베르크가, 
자연 과학자들이 자연을 파고들면 들수록 
그들이 보는 건 자기 자신의 개념들에 대한 일종의 반성임을 더더욱 깨닫게 된다고, 
말했을 때, 가리켰던 것이다 (1장을 보라). 
     

이러한 문제를 무시하고, 
콘라드 로렌츠 작업을 시작으로 
발전된 진화론적 인식론 운동은, 
특히, 
도날드 켐벨이 그 인식론에 부여한 확장된 형식에서 
상당한 기세를 얻었다; 

그는 
그것을 ‘가설적 비판적 실재론’으로 특징 지웠다. 

켐벨은 
<공간, 시간, 그리고 인과성 개념들은, 
칸트 생각처럼, 
인간 이성의 아 프리오리 요소들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체가 우주에 적응한 결과다>라는 점에서 
로렌츠와 의견을 같이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은 
‘실재에 대해 훨씬 정교하게 다듬어진 견해(視角)를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이들 변이들이 
몸의 형식 혹은 시지각물 혹은 과학적 이론까지 
통제하고 있다 해도, 
Ding an sich(물-그-자체)는 
항상 간접적으로만, 
언제나 알기 주체의 설정(假定) 언어로만 
알려진다. 
이러한 의미로,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반영,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에서 선택되어진 것>에는, 
간접적이나마 일종의 객관성이 있다. (Campbell,1974, p.447) 

 객관적 실재의 그와 같은 일종의 ‘반영(reflection)’을 전제(當然視)함에 있어 결점은, 
<<특정 시점에 바이어블한 (즉, 적응된) 것으로 입증된, 
<진화된 물리, 행동, 개념, 등등 구조>가 
가능한 최상의 적응을 향한 필연적 도정(道程)에 있다>>고 
믿을 여하한 근거도 없다는 점이다. 

오늘날 생존한 것들을 보존한 자연 선택은 
(그것들을)
우연한 변화들로 실제 야기된 변이들 중에서만 골라냈을 것이다. 

이때 
켐벨이 말한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은, 
개념적 수준에서, 
그 당시엔 불가결하게 보였던 기본 원리와 양립 불가능했기에 
단연코 시도되지 않았던 
훨씬 더 무수한 다소 부적합한 설정들을 배제하고 있다. 

게다가, 
<유기체 적응 결과로 
자연 자체의 어렴풋한 구조가 알려진다>는 생각은 
생물학자들의 발견, 
<수백만 년을 진화 생존했음에도 
그 종들 대다수가 특정 시점에 멸종되었다>와는 전혀 맞아들지 않는다.

 
     그런데, 
더 근본적 논리적 결함이 
진화론적 인식론의 전제들에 있다. 

로렌츠 쓰기를, 
‘주어진 환경 조건에 적응은 
그 조건에 관한 정보 획득과 동등한 것이다’(1979, p.167). 

이게 
그의 학파의 주된 단정(斷定)이지만, 
정당화될 수 없다. 

적합(fitness) 또는 
바이어빌러티와 같은 생물학 개념에서, 
유기체나 종들은 각기 
‘부여된’ 환경에 관한 정보을 소지할 또는 
그 환경과 속성들을 공유할 필요가 없다. 

적응에 요구되는 것은, 
유기체들이 
긁히거나 충돌하는 지점들을 피하는 것뿐이다. 

자연 선택의 체(sieve)를 통과한 그 어떤 것도 
자신이 걸러지지 않았다는 걸 알 수는 있지만, 
이에는 그 체의 구조와 관련된 여하한 지시도 없다. 

진화론과 구성론 모두에서, 
‘맞아들다(適)’는, 
거기 있었을 여하한 제약들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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