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의 책과 논문들과 NHK의 번역을 모은 게시판

에른스트 폰 글라저스펠트를 기억하며 

by 빈센트 케니 – 2010, 12, 1. 


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미국 암허스트 시간 오전 7시, 에른스트는 그의 침대에서 평화로이 영면에 들었다. 그는 93살로 장수를 누렸다. 


“And howelse do we hook our hike to find that pint of porter place? Whence. Quick lunch by our left, wheel, to where. Long Livius Lane, mid Mezzofanti Mall, diagonising Lavatery Square, up Tycho Brache Crescent, shouldering Berkeley Alley, querfixing Gainsborough Carfax, under Guido d’Arezzo’s Gadeway, by New Livius Lane till where we whiled while we whithered. 
Old Vico Roundpoint. " -- 제임스 조이스 – 피네건스 웨이크 

위에 제임스 조이스가 쓴 걸 정말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블린에서 오래 동안 살아 보아야 할 것이다. 아일랜드 사람한테 윗글은 아주 분명히 웃긴 이야기지만, 외부 사람한테는 모호하고 신비적인 것이 된다. 한편, 에른스트는 아일랜드에서 1939년부터 10년을 살며 아일랜드인으로 살 기회를 얻었고, 죽기 몇 주 전까지도 1946년판 아일랜드 여권을 지니고 있었다. 출생 당시, 그의 아버지는 뮌헨의 오스트리아 대사관, 문화 공보관이었지만 1차 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하면서 자동으로 체코 시민이 되었기에, 그가 지닌 만료되는 체코 여권은 아일랜드 여권으로 바뀌었다. 구성과 재구성들! 

아일랜드인 되기 한 과정으로 (나는 더블린 학생들한테는 그를 에른스트 O' 글라저스펠트로 소개하곤 한다) 그는 제임스 조이스의 텍스트들을 파고들면서, 자신의 농장이 있던 더블린 언덕과 더블린 시를 차로 오가며 근처를 둘러보는 가운데 조이스가 제공한 지도를 통해 더블린의 대로와 골목길, 그리고 그 주변들을 알게 되었다. 조이스가 이들 아일랜드 골목길들을 유머로 이용한 바에서, 에른스트는 여기서 자주 언급된 ‘비코’라는 이를 발견했다. 피네건스 웨이크 시작 줄에서 더블린 주위 여행 관련 묘사를 볼 수 있다; “Howth Castle and Environs로 돌아 다시-순환하는 commodius vicus를 따라.”* 

조이스 거작에 대한 더블린 문학 토론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에른스트는 더블린 도서관에서 순환적 역사 이론을 제기한 지암바티스타 비코라는 이태리 철학자가 있었다는 걸 발견했으며, 조이스가 그의 책에 비코의 작업 사항들을 새겨 넣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에른스트는 비코의 지식이론 공부를 계속하다, 이어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또한 버클리를 발견했다. 버클리에 대한 연구로 그는 쟝 삐아제와 실비오 케카토의 작업들을 최종적으로 선택 지지하게 되었다. 

나는 세 개의 나라, 아일랜드에서 처음, 이어 이태리, 그리고 미국에서 에른스트를 알게 되는 멋진 구성적 행운을 얻었다; 내가 종종 방문했던 미국 암허스트의 그의 집은 그가 지어 대략 10년 전 화재로 불타기 전과 똑같이 그가 다시 지은 집이었다. 그가 엄청 후회한 것들 가운데 하나는 그 화재로 자신의 광범위한 철학 장서 대다수를 잃어버려 그것을 재구성할 시간을 갖지 못한 것이었다. 

조이스가 “특정 보편을 헤쳐나가는 상상의 여정”, 그리고 당연 “휴게소에 들러 한잔하는”으로 묘사하곤 했던 대로, 더블린과 윅클로우 산들을 거치는 우리 여행들 하나를 회상하면, 우리는 한때 우리가 타고 다니던 엄청나게 안락한 볼보의 주인인 대단했던 우리 친구, (古代 심리치료학자) 바틀리 쉬한과 어울려 그 언덕들을 이리저리 쏘다녔다; 1939년부터 전쟁 내내 아일랜드에서 살 때 선술집, 이탄(泥炭) 습지, 그리고 그가 들리는 다양한 아지트들을 쏘다녔으며, 그 결과 마침내 그가 첫 번째 아내 이사벨과 무남독녀 산드라와 함께한 농장을 마련했던 곳에 이르렀다; 히틀러가 자살한 약 2주 후, 그가 자주 행복하게 언급하곤 했던 산드라가 태어났다. 

불행히도, 인생에서 그의 가장 고통스런 경험들 가운데 하나는 1991년 크리스마스에 그의 딸 산드라의 자살이었다. 그는 자주 깊은 곤혹감을 드러내곤 했다: 그녀가 어찌해서 처음에는 여하한 형식의 규칙들도 거부하는 반란자가 되었고, 이어 마약 중독자가 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는지? 어린 딸이 이사벨과 자신의 매직 서클에서 배제된 느낌을 가질 정도로 이사벨과 가깝게 지내지 않았더라면, 하고 종종 물을 때마다 매번 그는 가슴 저미는 고통을 호소하곤 했다. 커플로서 자신들의 밀접함이 산드라한테 ‘틈 없는 벽’을 실감케 하여, 까끔씩 부모 중 한쪽이 이미 거절한 호의, 특권 또는 갈망을 얻고자 아이들이 거절한 쪽을 ‘적’으로 돌리고 다른 쪽과 연합하는 흔한 생존전략을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지 않았는가 하고 걱정했다. 에른스트는 산드라가 이를 해낼 수 없음으로 해서 외로움을 느꼈고 ‘아웃사이더’까지 된 것이라는 충격적인 확신을 갖고 있었다. 

이런 특별한 시절로 돌아가는 여행에서 우리는 그가 살았던 더블린 외곽 킬터르난의 농가집을 방문하게 되었고, 지금 거기 살고 있는 온화한 농부의 아내는 우리한테 막구운 스콘과 뷸리 어얼그레이 차를 대접했고, 그러는 사이 에른스트는 근 60년 전 그가 거기 살 때 그 집이 어떤 식으로 지어졌는지를 그녀한테 설명했다. 에른스트한테, 그러한 행운의 방문은 상당히 감격적인 사건이었으며, 우리는 그 지역 시골 선술집에 들어서면서 전쟁 중에 아일랜드로 피신했던 모든 친구들과 지인들을 회상했다; 여기에는 쉬뢰딩거와 같은 위대한 인물들도 있었으며, 그는 더블린의 쉬뢰딩거 집에서 자주 차를 마시곤 했다. 

병으로 몇 년 뒤 죽기 전 바로 몇 주 전까지도 쓰고, 소통하고, 콘퍼런스에서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최근의 담화들 가운데, C:ADM2010 (사이버네틱스. 예술, 디자인, 수학) 콘퍼런스에서 행한 만찬 연설은 http://www.asc-cybernetics.org/2010/?p=2700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근들어 더 안들리고 안보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의 발표들을 끈질기게 계속했다. 작년 비엔나에서 비엔나 시가 수여하는 상을 받았을 때도 그는 완벽한 장문의 발표를 해냈다. 이후 유일한 곤란은, 사람들이 묻고 있는 것도 그들이 어떤 언어로 말하는지도 들을 수 없었기에, 연단 아래서 오는 질문들에 응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몇몇 영어 질의자들은 독일어로 답변을 받는 가운데 실제 수많은 재밌는 상호작용들이 일어났다. 한 달 전쯤 그가 또 다른 싸이버네틱스 모임에서 3분정도 연설을 했는데, 이것은 그의 평소 다른 발표에 비해 너무 짧아 가히 기록이라 할 만한데, 그의 시각과 청각기능에 문제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더 짧아졌지만, 항상 흥미롭고 경탄할 정도로 명쾌했다. 이제 발표 시간을 3분만 허용하는 콘퍼런스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 

암 관련 경험들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거의 없는 건, 그가 그러한 대화들로 그 현상에 ‘너무 많은 중요성이 두어지는’ 걸 내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지난 투병 경험 10년은 그의 아내 샤롯의 깊어가는 치매를 지켜보는 더욱 고통스런 경험과 일치한다 - 이는 지난 25년간 그들의 ‘친밀감’을 괴멸적 상태에 이르게 했다. 해서, “잘 지내나”와 같은 피상적 인사말을 제외하고 우리 대화에서 투병 경험을 강조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는, 말할 나위 없이, 특정 주제들에 ‘조망을 유지하며 주의(注意)를 집중시키는’ 자신의 급진적 구성주의 접근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항상, 에른스트는 우리 인간은 자신의 주의를 놓아댈 곳을 결정할 재능이 있음을 강조했으며, 이에 대한 중요성을 갖는 수많은 사례들을 보였다 - 그것들 가운데 하나는 눈사태에서 살아남은 스키어들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내가 ‘테니스 치는 사람’이란 대담에 썼으며http://www.oikos.org/Anyonefortennis.pdf 에서 볼 수 있다. 

에른스트는 보다 훌륭한 인간 가치들을 깊이 체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마지막 위대한 신사들 가운데 한명이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위대한 중앙-유럽 문화의 배경을 체현한 사람이었다. 그를 묘사한 단어들이 실제 오늘날 용법과는 거리가 먼 것들인 것은, 일부는 인간 관계의 상업화와 야만화 때문이며, 일부는 이들 단어들에 해당될 수 있는 사람들은 몇 명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 단어들에는 ‘예의바른, 공손한, 관대한, 점쟎은, 겸손한, 지분(知分) 혹은 자각(自覺)한, 도덕적인, 그리고 정직한’과 같은 용어들이 포함된다. 달리 말하면, 내 어머니 같은 이는 ‘잘 양육된’이라 불렀다. 이상과는 반대되는 태도들, 무례함, 속임수, 조잡한 이기주의(自己-本位), 자학(自虐)적, 거들먹거림, 스스로 뻐기는 자만, 의도적 무시, 노골적인 부정직이 조장되는, 증가하는 세계에서 그의 상실감은 훨씬 더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불행히도, 이상의 형용어들과 쉬이 연결되는 이들을 알아보고자 훨씬 멀리까지 내다보는 일은 사람들한테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와 같이 무시하는 면전에서조차, 에른스트는 자신의 비상하게 명백한 지력과 엄청난 인내를 계속해서 재차-보여주었다(re-presented) - 특히 자신의 급진적 구성주의 이론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걸 듣는 것에 반복적으로 실패한 이들한테 - 그리고 계속해서 잘못된 이해를 반복하는 이들과 이러한 잘못된 이해들에 기반한 실패한(miss-taken) 비판에 대해 그리했다. 죽기 몇 일 전 출판된 그의 마지막 논문에서 그는 변함없이 그와 같은 잘못된 이해들을 끈기 있게 수정하고 있다. 급진적 구성주의에 대한 그의 해설은 명백한 것들을 적절히 진술하는 항상 간략한 방식을 취했다 - 그럼에도, 많은 소위 전문가들을 포함해서, 사람들은 그가 확언하고 있었던 것들을 계속해서 잘못 이해했다. 

에른스트는 다른 이들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응대했다 - 말인즉, 그가 함께 하고 있는 인물 유형에 맞추어 자신의 관계 양식을 바꾸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예의바르고, 명확한, 관대한 인내심 지닌, 그리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무슨 연유로 야기되었든 극도의 압박 가운데서도 달리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로마에서 그가 이태리어를 쓰면서 자신의 기억에서 어떤 단어들을 빨리 찾을 수 없었기에 자신한테 조금 짜증을 내는 걸 한번 보았다. 

그가 비엔나 시 금메달을 시청 공식 행사장 호화로운 무대에서 현악 4중주, 연설들, 그리고 놀라운 만찬과 함께 받았던 지난 11월(2009), 우리는 비엔나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냈다. 이는 그의 위대한 친구 하인츠 폰 푀르스터를 기리는 학회가 열린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콘퍼런스에서 에른스트는 개회 연설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학회의 사이버네틱스를 비엔나 시가 그한테 수여한 개인적 영예와 연결지었으며, 당연 우리는 비엔나 대학 건물 앞 Dr. 칼 뤼거-링에 있는 프로이드가 즐겨 찾았던 그리고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까페 란트만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봉비뵈(bon viveur) 정신을 보여주며 국제 회의를 열었다; 거기서 우리는 현재 사이버네틱스 세계의 몇몇 권위자들을 만나, 복잡하지만 갖가지 매혹적인 대화들로 계속해서 들고나는 가운데 란트만에서 제공하는 최고의 것들을 시식했다 - 특히, 게백켄 토펜토르테(Gebackene Topfen-Torte)와 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곁들인 이상하게 훌륭한 란트만 소시지를! 잔들이 채워지면서 연루되는 이들은 내내 많았다. 

윅클로, 더블린, 암허스트 또는 로마 이상으로, 에른스트는 비엔나에서, 또한 란트만에서 진정 편안해 했다 - 이는 비엔나라는 오래된 세계의 매력과 에른스트라는 오래된 세계의 매력이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에, 그리고 또한 프로이드, 아들러, 부버, 폰 프리위, 프랭클, 로렌츠, 하이에크, 포퍼, 쉬뢰딩거, 비트겐쉬타인, 하인츠 폰 푀르스터, 파이어아벤트, 등등과 같은 이들을 떠올리게 하는 비엔나가 지난 세기 폭발적 창조성의 놀라운 핵심 지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비엔나는 또한 에른스트의 마음을 그답게 만든 놀랄만한 창조성을 발현하도록 했다. 그는 지난 세기 인간 창조성의 가장 놀랄만한 현시(顯示)들 가운데 하나로 정말 중요한 일부다.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비엔나에서 함께 할 수 있어 나는 정말 기쁘다. 



                                Vincent Kenny                                                  Roma 01 December 2010 



*The water reaches Hill of Howth and the latter becomes also HCE. It is also as if Ireland lures invaders as the waters beat against the Hill or Head of Howth. "Commodius vicus of recirculation" refers to Vico's (vicus) theory of history as repeating (recirculation) itself. "Vicus" is the Italian word for Vico and Vico was an Italian. Vico, in Italian, also means "street." Commodus refers to the decayed times of the Roman emperor, Commodus. "Commodious" suggests also spacious and easy, as well as the commode or decay, as well as the polluted fluid of the ri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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